[밀물썰물] 식량주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16일 조재호 신임 농촌진흥청장의 취임 일성은 “식량안보에 대응하기 위해 식량자급률을 높이겠다”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곡물가가 급등하고 있으니 옳은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농민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식량자급률 목표 수준 법제화’ 요구에 대해 그동안 외면했다. 자체적인 곡물 생산 확대에 중심을 둔 식량주권보다는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는 근시안적 정책에 매몰되고 말았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끝 모를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탓으로 올해 밀 생산량이 크게 줄 것으로 보이자 곡물 수출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여기다 세계 2위 밀 생산국 인도가 갑작스럽게 밀 수출 금지령을 내리자 세계적으로 밀가루와 빵 가격까지 급등하는 ‘공황 반응(panic reaction)’이 나오고 있다. 인도의 밀 수출 금지 조치는 각국에서 식량 보호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이다. 다가오는 식량위기의 시대엔 돈이 있어도 곡물을 마음대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밀은 우리나라에서 쌀에 이어 제2의 주식이 되었다. 그런데 2019년 기준 밀 자급률이 0.7%라니 한숨이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0%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2016년 50.8%였던 식량자급률은 2019년 45.8%로 후퇴했다. 그나마 주식인 쌀을 자급해 세계적인 식량위기에도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식량 수급이 불안한 상황에서 주요 곡물 수출국들은 자국의 실리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마련이다. 또 초국적기업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앞으로 상당 기간 취약한 식량자급률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국방력을 강화하듯이 지금이라도 식량자급률을 높여 식량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식량주권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예상치 못한 위기는 또 발생할 것이다.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신자유주의의 잘못된 논리가 세계 농업의 다양성을 쓸어버리고 결국에는 인류의 재앙으로 변모하고 말 것입니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세계무역기구의 시장개방 확대에 반대하면서 몸을 던진 이경해 농민은 마지막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