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위하여”에서 “더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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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오랜만에 회식에 참석할 기회가 많아졌다. 회식하면 으레 술잔을 부딪치면서 외치는 건배사가 떠오른다. 그냥 ‘건배’라고 외치면 함께 잔을 비우자는 뜻이지만 우리는 특별한 건배사를 통해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좋아한다. 요즘에는 워낙 기발한 건배사들도 많지만, 대개는 건강, 행복, 승진, 합격, 성공 등 긍정적 미래를 기원하면서 “~를 위하여”를 외친다. 함께 추구할 공동의 목적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영혼 없이 “위하여”만을 외치기도 한다.

‘위함’ 속에 숨겨진 욕망 보게 돼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 위한 것
함께 사는 길 고민하고 추구해야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행동 대부분은 무엇을 또는 누구를 ‘위한’ 것들이다. 출세를 위해 공부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도 하고 투자도 하며,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하고 세금도 낸다. 위함은 목적이나 대상이며 그것을 향한 행동에는 대개 크고 작은 희생이 따른다. 건강을 위해 맛있는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고 재난을 당한 사람을 위해 소비를 줄여 기부도 하고 힘들여 봉사도 한다. 그러니까 ‘위함’의 사유 속에서 행위의 대상과 주체는 분리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나쁨을 통한 좋음의 추구라는 서사 구조가 깔려 있다. 우리는 흔히 국민을 위해 정치하고, 학생을 위해 교육하며, 환자를 위해 진료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그 속에는 정치와 교육과 의료를 통해 출세와 명예와 생계를 추구하는 우리의 현실적 욕망이 숨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신하를 위한 임금의, 자식을 위한 어버이의, 지어미를 위한 지아비의 벼리(綱)를 말한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 대표적인 ‘위함(爲)’의 윤리다. 벼리(綱)는 그물을 펼치고 오므리는 외줄이다. ‘위함(爲)’의 반대급부인 강(綱)은 지배와 섬김의 위계질서가 되고, 신하와 지어미와 자식은 임금과 지아비와 어버이가 휘두르는 외줄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 존재다. 위함(爲)과 권력(綱)은 동전의 양면이다. 2400년 전 혼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살았던 맹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군주의 감언(甘言)이 사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심을 가리는 말장난이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작은 이익들을 주고받는 위민(爲民)의 정치를 비판하고 진정으로 기쁨과 큰 이익을 백성과 함께 나누는 여민(與民)의 정치를 역설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 새 건물을 짓고 여민관(與民館)이라 이름하였다. 백성과 기쁨을 함께한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치이념을 담은 작명이었을 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그 이름이 위민관(爲民館)으로 바뀌더니 문재인 정부에서는 다시 여민관이 되었다고 한다. 현 정부는 아예 청와대를 떠남으로써 위민과 여민 사이의 긴장 자체를 없애 버렸다. 그 결정을 위한 공론화 과정도 없었고 여론의 반대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위하여’도 ‘더불어’도 아닌 ‘나 홀로’의 정신이다.

‘위하여’와 ‘더불어’와 ‘나 홀로’ 사이의 긴장이 위정자와 국민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자와 고객, 교사와 학생, 의사와 환자 사이에도 이런 긴장은 늘 있게 마련이다. 시장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멘트가 난무하고, 학교에는 학생을 위해 기획된 많은 행사가 있으며, 병원에서는 환자 중심 의학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맹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겉모습이 진정으로 고객과 학생과 환자의 이익과 행복을 걱정하고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 어렵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공자와 맹자와 순자는 겉으로 드러나기 어려운 마음을 담는 그릇인 예(禮)를 다듬고 가꿈으로써 마음의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예(禮)가 마음의 폭과 깊이를 다 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겉치레 말보다는 넓고 깊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우리도 고객과 학생과 환자의 마음을 사업자와 교사와 의료인의 마음과 함께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마련하면 좋겠다. 상품과 서비스를 팔고 지식을 나눠 주며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상품과 지식과 질병 속에 담긴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 보자는 것이다. 그 삶의 틀은 고객과는 상호 이익을 도모하고, 학생과는 함께 배우며, 환자와는 더불어 치유의 길을 찾아가는 경험이 쌓였을 때 만들어진다.

이 세상에 말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가치나 목표 또한 없다. 자주 입에 올리는 말속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담아 외친다면 그 실천을 위한 지혜를 모으기도 쉬어질 것이다. 이제 술자리 건배사를 ‘위하여’가 아닌 ‘더불어’로 바꿔 보자. 그리고 그때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함께”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생각하고 말해 본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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