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170) 극대화된 침묵이 환기하는 인간의 자리, 최종태 ‘침묵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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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작가 최종태(1932~1978)의 ‘침묵의 대화’(1970)는 긴장이 감도는 어두운 실내에 생경하게 놓인 커다란 물품 운송용 목재상자를 극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상자가 놓인 공간 뒤로 화면을 이등분하는 수평 난간이 있고, 난간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거무스름한 색조와 어디인지 식별되지 않는 장소의 분위기, 굳게 닫힌 물품상자의 정적인 조합 탓에 작품 속 공간은 오랫동안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은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의 정서를 자아낸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침묵은 역설적으로 이곳에 부재하는 말들로 채워지는 대화를 요구한다.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단서는 쉽게 찾아진다. 물품상자 표면 정중앙에 ‘백마. 9×29R3’ ‘병장 최판수’라는 글자가 표기되어 있고, 백마부대를 상징하는 마크와 ‘69.7.19.’라는 날짜를 기록한 표식이 덧대어져서 있다. 베트남전쟁을 상기시키기 위한 군용박스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4년 1차 파병, 1967년 5차 파병이 이뤄졌다. 백마부대는 1966년 10월 대규모 전투 부대로 베트남에 갔다. 당시 국내 최대의 국제무역항 역할을 한 부산항에서 많은 사람이 미군 수송선에 오른 백마부대 장병들을 환송했다. 전쟁에는 대규모 군수물자가 필요했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필수적으로 대량의 수송박스를 생산해야 했다. 참전장병들은 전쟁터로 보내진 수송박스를 재활용해 일명 ‘귀국박스’를 만들었다. 귀국박스에는 자신이 사용한 사물과 함께 한국군에게 제공된 미군전투식량 시레이션(C-Ration)을 담았다. 고국으로 보낼 가전제품과 고물로 팔 요량이었던 탄피도 넣었다. 이 귀국박스는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장병을 대신한 유품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은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나라에서 산업 성장의 길로 돌아서는 1960~70년대 한국적 상황의 계기가 되었다. 분단국가 한국은 미국의 경제원조로 대미시장 수출을 증대시키며 산업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 군사정권이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조한 탓에 이 시기 긴장, 억압, 폭력의 서사는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태의 작품 속 굳게 닫힌 귀국박스는 이러한 한국적 그리고 세계사적 상황 속에서 ‘침묵 되고 침묵 당한’ 모든 인간의 자리를 환기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와 민족, 이념과 계급을 넘어 전쟁에 동원되고 학살당한 인간, 나아가 군사와 결합한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소환되고 착취당한 모든 인간의 시대적 운명들. 극대화된 침묵을 전면화하는 방식을 통해 되려 눈에 보이지 않고 표현되지 못하는 거대한 진실의 역사가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다. 그 힘이 작품 ‘침묵의 대화’가 지닌 웅장한 성과가 아닐까. 강선주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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