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천마을 막내 30대 카페 사장 “여기 온 건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산복빨래방] EP 7.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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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빨래방] EP 7.
산복은 아름다워-기남 씨 이야기



지난해 여름, 호천마을에 카페 ‘노란호랭이’를 차린 김기남(36) 씨. 카페를 찾는 어르신들은 기남 씨를 친딸, 친손녀처럼 대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젊은이가 많아져 마을이 시끌벅적해지기를 바란다. 정대현 기자 jhyun@ 지난해 여름, 호천마을에 카페 ‘노란호랭이’를 차린 김기남(36) 씨. 카페를 찾는 어르신들은 기남 씨를 친딸, 친손녀처럼 대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젊은이가 많아져 마을이 시끌벅적해지기를 바란다. 정대현 기자 jhyun@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빨래방 2개월 차에 접어들며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에 더욱 주목하게 됩니다. 산복도로라고 해서 어르신들만 사는 건 아닙니다. 오늘은 빨래방이 있는 호천마을 ‘막내’를 소개합니다. 마을 막내가 꾸며 놓은 공간에서는 어머님, 아버님이 자연스레 아메리카노와 스무디를 즐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막내는 친딸, 친손녀처럼 살갑게 마을 어르신들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서 유일한 카페 ‘노란 호랭이’

김기남 사장 어울리며 살기 배워

과일가게 고친 곳이라 과일도 팔고

어르신 손님 배려한 특제 메뉴도

허물없이 지내며 산복도로 정 만끽

젊은 사람 함께 북적이는 마을로

부산진구 호천마을에 하나 뿐인 카페 ‘노란 호랭이’는 버스정류장과 바로 붙어있다. 오래된 산복도로 집들 사이 샛노란 카페는 마을 분위기를 바꿨다. 부산진구 호천마을에 하나 뿐인 카페 ‘노란 호랭이’는 버스정류장과 바로 붙어있다. 오래된 산복도로 집들 사이 샛노란 카페는 마을 분위기를 바꿨다.

■샛노란 카페

1년 전 뙤약볕이 내리쬐던 무더운 여름날. 산복도로 안창마을과 호천마을 경계에 있는 창고는 분주했다. 마을에서 찾아보기 힘든 젊은이 한 사람이 여러 날을 창고에 들락거렸다. 마을 주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관광객을 제외하면 젊은 사람은 마을에서 쉽게 보기 힘든 탓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를 자연스레 경계했다.

창고를 숱하게 살피던 젊은이는 며칠 뒤 페인트통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회색빛 가득하던 침침한 창고는 샛노랗게 변신했다. 창고 안 천장과 벽 한쪽에는 마른 꽃들이 걸렸다. 세월을 그대로 담아 색이 바랜 집들 사이에 노란 창고는 오가는 사람들 눈에 띄었다. ‘저기에 뭐 하려고 저러나?’ ‘못 보던 젊은 사람이 유난스럽네’ 같은 시선이 쏟아졌다.

창고는 원래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과일 가게였다. 주민들은 버스에 타기 전 과일 가게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시내에 들렀다 집으로 가는 길엔 버스에서 내려 과일을 사기도 했다. “니 잘해야 된다, 옛날에 여기가 어떤 데였는지 알제?” 주민들은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조언인 듯 잔소리인 듯 한마디씩 툭툭 건넸다. 오랜 터줏대감이었던 과일 가게 할머니 대신 나타난 젊은이가 마을 사람들은 영 미덥지 않았다. 텃세 같은 내외는 어쩌면 당연했다. 창고는 화사하게 마을에서 유일한 카페로 변신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아메리카노 2000원, 스무디 3500원….’ 식후에 마시는 커피 믹스에 익숙한 주민들에게 가게 앞 메뉴판은 남의 나라 ‘꼬부랑말’일 뿐이었다.

먼저 다가가야만 했다. “어머니 찬 거? 따뜻한 거? 달달한거? 약간 쓴 거? 커피 들어간 거? 안 들어간 거?” 사장 김기남(36) 씨는 스무고개로 자연스레 주문받기 시작했다. 예전 과일 가게를 기억하는 주민들을 위해 카페 한쪽에서는 과일, 채소도 팔기 시작했다. 옛날 과일 가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커피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옛날 스타일의 달콤한 얼음 팥빙수도 처음으로 만들었다.

“기남아, 커피 한 잔 주라.” 사장이라는 칭호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단골이 늘어갔다. 손님 얼굴을 확인한 기남 씨는 아이스 라테에 시럽을 조금만 추가한 ‘특제 커피’를 내놓는다. 당뇨가 지병인 아버님의 몸 상태를 고려한 맞춤 커피다. 기남 씨는 오후 2시 이후에는 어머님, 아버님들에게 커피를 잘 권하지 않는다. 혹여나 커피 때문에 밤잠을 설칠까 하는 생각에서다. 밤잠 설치게 하는 커피 대신 평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고구마 라테, 요거트 스무디가 카페 최고 인기 메뉴다.

음료를 마시지 않아도 자리를 내어 드리지만, 주민들이 머뭇거릴 때면 더 살갑게 “어머니, 머리하셨네요?” “아버님, 주말에는 뭐하셨어요?”하며 기남 씨는 말을 건넨다. 카페에는 흔히 카페에서 들을 수 있는 최신 가요 대신 트로트, 7080 메들리가 흘러 나온다.

과일 진열대는 어르신을 위한 의자가 됐다. 과일 진열대는 어르신을 위한 의자가 됐다.

■산복도로의 의미

기남 씨를 산복도로로 부른 건 코로나19였다. 부산 서면, 동구 초량동에서 카페 매니저를 하며 경험을 쌓은 뒤 지난해 카페 창업을 고민했다. 그 무렵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었다. 고민 끝에 빚더미에 앉을 게 뻔한 도시 창업 대신 산복도로를 찾았다. 어렸을 적 키워 준 할머니 생각도 스쳤다. 산복도로라면 고객이 될 어머님, 아버님들과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카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년 시절 산복도로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온 만큼 산복도로는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그 동네에서 카페가 되겠느냐고 했지만, 기남 씨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마을에는 여느 카페와는 달리 평균 나이 70대에 육박하는 손님뿐이었다. 하지만 기남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산복행’을 후회하기보다는 근래 들어 가장 잘한 일로 꼽는다.

“그냥 한 분 두 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머님, 아버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위로받아요. 하루하루가 명절 같아요. 어머님, 아버님은 자식들한테 못 하는 이야기를 하고 저도 제 속마음을 저도 모르게 털어놓고 있어요. 먹을 것도 가져다 주고 밥 먹었느냐고 물어봐 주시고, 이런 데가 어디에 있나 싶어요”

산복빨래방이 마을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기남 씨는 우리를 누구보다 반겨줬다. 우리에게 동네 자랑, 주민 자랑을 늘어놓았다. 산복빨래방 식구들이 느끼는 산복도로의 푸근함을 기남 씨는 먼저 느끼고 있었다. 기남 씨는 호천마을에서 사계절을 보내면서 새로운 희망 사항이 생겼다. 아름다운 부산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을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하는 것이다. 찾아온 모두가 주황색, 흰색 불빛이 어우러진 야경에 심취하고, 봄날 정오의 햇살처럼 따스한 산복도로 마을의 감성에 젖기를 바란다. 관광객을 넘어 젊은 사람들도 같이 살아가는 마을을 그려본다. ‘노란 호랭이’ 카페처럼 더 많은 ‘호랭이’ 가게들이 생겼으면 하는 꿈이다.

“산복도로는 제2의 인생이죠. 산동네에 산다는 게 젊은 사람들이 볼 때는 신기하기도 하고 거기서 장사가 되나 싶기도 하겠지만, 어머님 아버님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재밌고 행복해요. 저 같은 사람이 마을에 여러 명 생겼으면 좋겠어요. 공방도 생기고 식당도 생기고 동네가 활기차 아버님, 어버님이 즐거워하시는 모습도 보고 싶어요. 제가 있어서 동네가 살맛 난다고 어머님이 농담으로 말씀해 주시는데, 사실 어머님 아버님들 덕분에 제가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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