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영원한 것은 없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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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국 경제부 유통관광팀장

요즘 잠자리에 들기 전 잠깐씩 ‘열국지’를 읽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을 호령했던 기라성 같은 맹주들이 주인공입니다. 천하 제후를 불러 모아 주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지는 ‘회맹’을 주관하는 게 바로 맹주(盟主)입니다.

한데, 이 맹주라는 양반들의 흥망성쇠가 기가 막힙니다. 대국이 일어서기 무섭게 망하고, 망국의 잿더미 속에서 또다른 대국이 일어섭니다. 너른 가슴으로 천하를 품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이도 있고, 20년 가까이 천하를 떠돌다 맹주의 반열에 오른 이도 있습니다. 책장을 스무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사그라드는 게 ‘열국지’ 속 맹주의 덧없는 권세랍니다.

피서철을 앞두고 뜬금없이 ‘열국지’ 이야기를 꺼낸 건 흔들리는 부산 바다의 판도가 책 속의 그것과 닮아서 입니다.

최근 부산과 연이 깊은 빅데이터 기업 TDI에 부탁해 재미있는 통계를 한 번 뽑아 보았습니다. ‘과연 부산 바다의 맹주는 여전히 해운대일까?’ 하는 짖궂은 생각이 든 까닭이지요.

온라인 상의 트렌드를 쫓아간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슬슬 휴가 준비에 돌입한 지난달 중순 전국의 검색량은 해운대가 아닌 광안리와 다대포로 쏠려 있었습니다. 인스타그램 같은 젊은 SNS의 누적 데이터도 광안리의 급성장을 증명해주고 있었고요.

물론, 해운대가 ‘열국지’ 속 제후국처럼 망국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해운대는 부산 시민에게 여전히 꿈의 도시가 아닙니까.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완성된 관광지인 터라 온라인 상의 선호도만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면이 많겠지요.

기사를 쓰다 침대 맡의 ‘열국지’가 떠오른 건 언제까지고 해운대의 그늘에만 가려져 있을 것 같던 다른 부산 바다의 성장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광안리만 봐도 ‘세상 일 모른다’는 말을 절감할 수 있지요. 광안리 하면 비좁던 해안도로로 악명이 높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게 역으로 세일즈 포인트가 됐습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손 닿을 듯 광안대교를 즐길 수 있어 힙한 매장이 줄줄이 입점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해운대 옆에 터를 잡고 들썩이는 송정 바다는 또 어떻습니까. ‘서프홀릭’ 등 관광벤처를 중심으로 송정 바다를 ‘부산 워케이션(휴가지에서 업무를 병행하는 원격근무 형태)의 성지’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입니다. 임금 수준이 높은 워케이션 족을 제대로 정착시킬 수 있다면 송정 바다라고 맹주를 꿈꾸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겁니다.

송도 바다는 왕년 광안리의 지위를 계승하는 모양새입니다. 북적이는 해운대를 피해 광안리를 찾던 가족 피서객은 이제 케이블카와 캠핑장이 있는 호젓한 송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영화 ‘브로커’의 촬영지로 알려지며 주목을 받은 다대포부터 신도시를 품은 일광까지 바다마다 모두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고, 트렌드가 변합니다. 어느 바다인들 영영 ‘변방’에만 머물겠습니까.

말 그대로 영원한 건 없나 봅니다. 코로나 엔데믹을 앞두고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부산 바다를 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부산 바다에 유쾌한 춘추전국시대가 열리려나 봅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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