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때를 아는 지혜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며칠 전 한 주택가 모퉁이에서 고양이의 장난을 보았다. 앞발로 툭툭 치다가 도망가려 하면 다시 물어다 놓는 그것은 매미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있다가 잠깐 바깥세상에 나서는 미물. 안 그래도 처연한 운명의 족속인지라, 문득 고려 문신 이규보의 ‘방선부(放蟬賦)’를 떠올렸다. 매미를 풀어 준 사연을 담은 글이다.

‘거미줄에 걸린 매미가 측은하여 줄을 풀어 매미를 살렸다. 곁에 있던 동료 대감이 트집을 잡는다. 같은 벌레인데 매미는 살려 주고 거미는 굶주리게 하느냐. 아니요. 거미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매미는 이슬만 먹고 살아 바탕이 맑을세라, 내 어찌 그냥 가리오.’ 이렇듯 옛사람들은 매미를 욕심이 적고 자질이 깨끗한 곤충으로 보았다. 중국 서진 시대의 문학가인 육운은 매미의 짧은 삶에서 군자의 다섯 가지 덕목, 곧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을 읽었다.

실상 매미의 생애는 처절하다. 짧게는 6년, 길게는 10여 년 동안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다 여름 한철 세상 밖으로 나와 번식기를 갖고 죽는다. 짝을 찾는 수컷의 애타는 울음소리와 암컷의 날개 비비는 소리가 집중되는 시기는 고작 20~30일이다. 작년에는 미국 중서부에 꼬박 17년을 기다린 뒤 나타난 매미 떼로 언론들이 법석을 떨기도 했다. 여기엔 놀라운 종족 보존 전략이 숨어 있다. 지상의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피해를 줄이려면 짧게 한꺼번에 출현하는 인해전술이 유리하단 얘기다. 그것도 7년, 13년, 17년 같이 소수 연도를 주기로 삼아야 천적과 마주칠 기회가 적다. 이제는 ‘19년 매미’도 나올 것이다. 깜짝 놀랄 과학성이, 아니 생을 이으려는 본능이 경탄스럽다.

원래 매미는 해가 뜨는 즈음부터 해가 지는 때까지 울음소리를 내는 게 생태적 특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열섬 현상과 빛 공해 때문에 매미 울음이 밤낮을 가리지 않게 됐다. 심지어 더욱 악착스러운 소리를 낸다. 이게 다 인간의 욕심이 매미의 혼동을 부추긴 탓이다. 매미가 그 시끄러움이 유난하긴 해도 생태계나 인체에 주는 해악은 없다.

모든 게 한때다. 매미도 곧 귀뚜라미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나야 한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새삼 깨닫는다. 매미의 다급함이 묻어난 울음소리도, 허물을 벗는 환골탈태의 몸부림도, 사실은 때를 아는 지혜라는 것을. 매미 일생의 뜨거운 울음과 함께 짧은 여름날도 끝날 것이다. 때가 되면 떠날 줄 아는 것. 이게 자연의 신비만은 아닐 터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