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재앙은 스스로 걸어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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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요즘 세상, 패망한 사회 닮아가나
통치자 행동은 국가재앙 바로미터
무능과 오만·요행 심리 빠져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치 않을 때
몰락한다는 역사 교훈 기억해야

왕조의 멸망을 다룬 기록이나 문명의 몰락을 다룬 신화에는 ‘망조(亡兆)’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곤 했다. 국운이 다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가 닥칠 경우, ‘재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인류의 고전 〈오이디푸스〉에도 이러한 흔적은 나타나 있다. 오이디푸스가 왕으로 집권하기 전, 테베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괴물은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냈고, 답을 모르는 이들을 마구 살해했다.


그러자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나 해답을 찾았고, 마침 공석이 된 왕의 자리는 이 젊은 영웅의 차지가 되었다. 이 젊은 영웅은 한동안 용감한 전사이자 훌륭한 임금으로 추앙받는 듯했다. 그런데 재앙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시 일어났다. 자연재해와 인재가 포함된 위기가 테베를 휩쓸었고, 재앙에 대처하지 못하는 왕에 대해 테베인들은 불안과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오이디푸스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느새 그는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망각한 군주가 되어 있었고, 찾아온 백성들에게 오히려 무엇이 문제인가를 되묻는 파렴치한 통치자로 전락해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죄, 본연적인 부도덕에서 찾곤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오이디푸스의 과거 죄보다는 현재의 무능이었고, 더 문제적인 사안은 그 무능이 과거의 죄로부터 잉태되어 두 죄악이 서로 얽혀 버렸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 이전 통치자 라이오스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과거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나라를 잃을 무렵에는 무능으로 점철된 통치자였다. 스핑크스로 테베가 도탄에 빠졌을 때, 그가 택한 해결 방안은 점을 보러 가는 일이었다. 현실 타개 의지는 빈약하고 오히려 요행만을 바랐던 그는, 오만한 성품까지 더해져 젊은 개혁자에게 축출되고 만 것이다. 자식에게 살해된 사실은 애석한 점이지만, 그 근원에 오만과 무능과 요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은 현재 통치자가 생각해 보아야 할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연극과 영화를 가르치기 위하여 나는 이 〈오이디푸스〉를 한 학기에 한 번씩은 수업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실을 확인하고 말았다.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많은 아이들을 물에 강제로 묻어야 했던 그날, 한 나라의 통치자가 뒤늦게 나타나 무엇이 문제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신화나 연극 속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어쩌면 사실이거나 역사였다. 한 나라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재앙이 목전 통치자의 행동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나에게, 요즘 세상의 모습은 2014년 4월 혹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왕조의 패망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집권자는 물에 잠기는 아파트를 보고 퇴근을 했고, 그 아파트 주민이 불편을 겪을까 봐 그 많은 사람들이 물에 잠겨 생사를 헤맬 때도 그 집에 머물렀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 수 있을까. 아우성치는 아이들의 부모와, 가뭄을 호소하는 테베의 백성과, 재앙에 두려워 떠는 주민들을 두고 여전히 한가로웠던 왕들의 기록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 않은가.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며, 늘 그 끝은 재앙과 몰락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도 육신의 눈을 잃고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야 비로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례 역시 과거 사례로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함께 기록해 둔다. 후세를 위하여. 우리도 지금 그러한 징후 앞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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