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쪽 분량 읽고 의견 내라”… ‘고리 2호기 공람’ 시민 우롱하나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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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10개 구·군 등 주민 대상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열람 진행
한 달 반 동안 10건… 취지 무색
공람 사실 모르고 내용도 어려워
전자 파일 내려받기 안돼 ‘형식적’
거주지 피폭선량 빠져 부실 논란

부산환경운동연합은 지난 11일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부산환경운동연합은 지난 11일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수명 연장을 위해 진행된 고리원전 2호기의 방사선환경영향평가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지적(부산일보 8월 12일 자 10면 보도)에 이어 이번에는 주민 공람조차도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상 지역 주민들이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공람 사실 자체를 모를뿐더러 비전문가인 주민이 구·군청을 찾아가 방대한 보고서를 그 자리에서 읽고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22일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과 부산시 등에 따르면 한수원은 지난달 8일부터 ‘고리2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초안) 공람’을 진행하고 있다. 방사선환경영향평가는 내년에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고리2호기를 계속 운전할 경우 환경에 미치는 방사선 영향을 평가한 보고서다.



방사선환경영향평가의 공람은 내달 5일까지 고리2호기의 반경 30㎞ 범위 내에 있는 부산의 10개 구·군(금정구, 기장군, 남구, 동구, 동래구, 부산진구, 북구, 수영구, 연제구, 해운대구)과 울산의 5개 구·군(중구, 남구, 동구, 북구, 울주군), 경남 양산시의 주민 대상으로 진행된다.

문제는 부산의 10개 지자체의 경우 방사선환경영향평가를 열람한 건수가 한달 반 동안 겨우 10건에 불과해 주민에게 투명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공람 제도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는 점이다.

22일 기준 각 지자체의 주민 열람 실적을 보면 기장군 5건, 남구 2건(취재진 열람 건 제외), 금정구 1건, 동래구 1건, 해운대구 1건 등 모두 10건에 불과하다. 게다가 의견제출과 공청회 요청 건수도 10개 지자체 모두 합쳐서 각각 7건, 4건에 그쳤다. 10개 지자체 중 절반인 5곳은 단 한 번도 주민 열람이 이뤄지지 않았다.


내년 4월 8일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고리2호기 전경. 부산일보DB 내년 4월 8일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고리2호기 전경. 부산일보DB

구·군청을 찾지 않아도 온라인에서 방사선환경영향평가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수원 고리원자력본부 홈페이지(https://www.khnp.co.kr/kori/index.do)에 접속한 뒤 ‘공지사항’에 들어가서 해당 문서(126번)를 열람할 수 있다. 그런데 문서를 파일로 내려받을 수 없고, 해당 사이트에서만 읽을 수 있도록 해놔 내용을 분석하고 천천히 숙지하는 데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뒤따른다.

부산환경운동연합 민은주 사무처장은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결과를 분석하기 위해 고리원자력본부 사이트에 들어가 보고서 한 쪽씩 스캔 작업을 해야 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주민들이 방사선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열람한다 하더라도 의견서를 제출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선 보고서 분량만 거의 500쪽에 육박하는 데다, 내용 또한 전문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지자체도 이 점을 인정했다. 부산 남구청 관계자는 “담당 공무원도 지식이 부족한데, 일반 주민들은 방사선환경영향평가 내용을 이해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조계에서는 방사선환경영향평가의 주민 공람 근거가 되는 ‘원자력안전법 제103조 제1항’을 달리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법무법인 민심 변영철 변호사는 “주민들이 원자로 운전의 적법성에 대한 어떤 전문적 견해를 제출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해당 법조문의 ‘주민 의견 수렴’ 부문은 주민들이 지정하는 원자력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 관계자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기술적으로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초안을 검토 중이며, 주민 의견을 수렴해 최종본을 다시 낸다”면서 “방사선환경영향평가 초안은 한수원의 지적재산일 수 있기 때문에 전자 파일 형태로 내려받을 수 없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고리2호기의 방사선환경영향평가는 7가지 중대사고에 대한 주민 거주지역의 피폭선량이 표기돼 있지 않아 부실 또는 졸속 논란이 일었다. 중대사고란 원전 설계기준사고를 초과하는 것으로, 심각한 노심손상을 초래하고 방사성물질의 외부 유출을 발생시킬 수 있는 사고를 말한다. 한수원은 이런 지적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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