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남은 강제동원 피해 조선인 유골 2799구 공식 확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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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일본 기타큐슈시 영생원에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유골 기록을 정리하고 있다. 유골을 싼 보자기 등에는 피해자 이름과 생년월일이 표시돼 있다. 영생원에는 모두 85구의 조선인 유골이 봉안돼 있다. 서일본신문 제공 지난달 31일 일본 기타큐슈시 영생원에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유골 기록을 정리하고 있다. 유골을 싼 보자기 등에는 피해자 이름과 생년월일이 표시돼 있다. 영생원에는 모두 85구의 조선인 유골이 봉안돼 있다. 서일본신문 제공

한·일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놓고 성과 없는 줄다리기를 이어간다. 반면 민간에서는 뜻깊은 소식이 잇달아 전해진다. 최근 일본에 봉안된 강제징용 조선인 유골이 2799구에 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부산일보에 파견 중인 서일본신문(후쿠오카) 히라바루 나오코 기자와, 현지 가네다 다이 기자가 직접 취재한 것이다. 앞서 올 7월 가네다 다이 기자는 일본 탄광에서 일하다 숨진 조선인 유골 4명의 신원이 밝혀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일본 후생노동성 취재 결과 확인

기타큐슈 영생원 보관 85구 등

일본 내 사찰·납골당 보관 유골

하루빨리 유족 품에 돌아와야

우키시마호 희생자 280구 비롯

유텐지 보관 유골은 집계서 제외


지난달 31일 일본 규슈 기타큐슈시 ‘영생원’. 시민단체 ‘강제동원을 생각하는 모임’(대표 우라베 데쓰오) 회원들과, 영생원을 관리하는 재일대한기독교회 고쿠라교회 관계자들이 유골함을 풀어 정리하고 기록하느라 바쁘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서 일하다 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골이다.

유골함 안에는 대부분 이름과 사망일, 나이를 기록한 종이가 있었다. 한국 본적지와 징용 당시 일하던 탄광으로 추정되는 일본 주소, 아버지 이름이 있는 유골함도 있다. 영생원에는 1930~1940년대 일본에서 일하다 숨진 조선인 유골 85구가 봉안돼 있다. 우라베 데쓰오 대표는 “한 분이라도 유족 품에 돌아가게 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일부 유골을 한국 유족에게 인계하고, 나머지 유골 정보를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제공하기 위해서다. 최근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영생원 유골 4구의 정확한 신원이 확인됐다. 그중 2구는 유족이 인수를 원한다. ‘강제동원을 생각하는 모임’ 등의 단체가 노력한 덕분(부산일보 7월 6일 자 1면 보도)이다.

25일 서일본신문이 일본 후생노동성에 확인한 결과, 일본 내 사찰 납골당 등에 봉안된 조선인 징용 유골은 모두 2799구에 달한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한·일 정부가 공동으로 일본 현지에서 조사를 진행해 확인한 것이다. 영생원에 보관된 85구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본에서는 가족 납골당이 없는 경우, 대개 사망자 유골을 절에 맡긴다. 2016년 일본 내 절에서 1구가 추가 확인된 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라고 후생노동성은 밝혔다.

그동안 양국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정부 간의 봉환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절이나 납골당에서 일본 정부에 한국 봉환을 계속 요청하지만 민간 차원의 봉환만 이뤄졌을 뿐이다. 한·일 관계 회복에 의욕적인 윤석열 정부가 올해 5월 출범한 뒤 민간인 유골 봉환이 진전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징용(徵用)’과 ‘징병(徵兵)’을 구별해 조선인 피해자 정보를 관리해 왔다. 징병에 대한 국가 책임은 인정하지만, 징용은 민간 기업의 영역이라는 입장이다. 1970년대 한국에 봉환된 유골들도 대부분 징병된 군인·군속이라고 일본 후생노동성은 밝혔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에 징병된 이는 모두 24만 3992명이었다. 이 중 2만 2205명이 사망했고, 약 2만여 명의 위패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일본 정부는 1970년대에 일부 조선인 징병 희생자 유골을 한국에 봉환했다. 1971년 11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총 1179구가 한국으로 온 것이다. 재일한국인단체가 한국인 전몰자 유골을 “분향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면서 일본 도쿄의 절 유텐지에 위탁해 성사가 됐다. 중앙대 오일환 겸임교수는 “한국인 유골 봉환은 1960년대 진행된 한국에 남은 일본인 유골의 봉환에 대한 답례처럼 이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봉환된 유골 중 유족 품에 못 간 채 부산 영락공원에 40년 이상 방치된 것이 194구(부산일보 8월 12일 자 1면 보도)에 달한다. 다행히 현재 국립 추도시설인 천안 ‘망향의동산’에 안치되기 위해 행안부로부터 신원 확인(강제동원 사실 확인) 절차를 밟고 있다.

유텐지에는 아직도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 280구와 북한 출신 징병자 유골 420구 등 조선인 유골 700구가 더 있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1945년 8월 24일 조선인 징용 피해자 등 3275명을 태우고 일본 아오모리현을 출항한 한국행 선박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폭발해 침몰한 사건이다. 한국인 524명과 일본인 25명 등 549명이 숨졌다.

유텐지에 보관된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은 대부분 군인·군속(일부 민간인 포함)이다. 따라서 후생노동성이 파악한 민간인 징용 사망자 유골(2799구)에는 유텐지 보관 유골은 포함되지 않는다. 일부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진상규명이 먼저”라며 인수를 거부해 남은 것이다. 많은 유해를 합쳐서 화장하는 바람에 누구 것인지 판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인수 거부의 이유다. 이들은 1990년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한국 정부가 파악한 일본 내 봉환 대상 규모는 1만 1010구로, 그중 6812구가 아직 봉환되지 못한 것으로 추산한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4~2015년 조사한 것이다. 이 수치는 정부가 피해 유족 등에게서 신청받아 집계한 것으로, 일본 정부가 파악한 조선인 징용 유골 2799구와 큰 차이가 난다. 가네다 다이·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 naokonbu19@gmail.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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