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이…작가의 움직임이 쌓인 산 그림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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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작가 윤종숙 개인전 ‘SAN’
23일까지 조현화랑 해운대
마음속 한국의 산 그림에 담아
“색, 선, 면 사용에 제한이 없어
작가의 몸짓이 레이어로 쌓여”

윤종숙 'Kumgangsan'(2022). 조현화랑 제공 윤종숙 'Kumgangsan'(2022). 조현화랑 제공

산을 덩어리로 그리는 작가.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윤종숙 하면 ‘아, 그 산을 덩어리로 그리는 작가’라고 말해요.” 윤종숙 개인전 ‘SAN’이 23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달맞이언덕에 위치한 조현화랑 해운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 18m, 세로 4.9m 크기의 대형 벽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4일간 그린 것입니다. 작업 첫날 벽을 마주하고 앉아 무엇이 좋을까 생각했어요. 독일에서는 ‘그레이’ 톤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제 앞에 전시하신 김종학 작가의 그림을 보니 ‘레드’로 마음이 바뀌더군요.” 낯선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대형 벽화를 완성하는 일은 윤 작가에게 신선한 도전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흥분이 되더라고요. 제가 모르던 세계를 발견한 느낌, 다음 작업에도 영감이 될 것 같아요.”

윤종숙 작가. 오금아 기자 윤종숙 작가. 오금아 기자
윤종숙 작가의 대형 벽화(왼쪽)와 다른 작품들이 전시된 모습. 오금아 기자 윤종숙 작가의 대형 벽화(왼쪽)와 다른 작품들이 전시된 모습. 오금아 기자

윤종숙 작가는 1965년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집이 물가에 있었어요. 건너편에 산이 있고. 아버지가 화랑을 하셔서 집에 병풍이나 족자 같은 고미술품이 많았죠.” 그는 집 밖에서는 자연의 산을 보고, 집안에서는 병풍 속 산 그림을 보고 자랐다고 했다. 이것은 30년간 독일에 머무는 윤 작가의 그림에서 많은 이들이 동양적 산수화를 발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은 유럽에 있어도 마음 한쪽에는 늘 자라난 고향이 있어요. 독일에서 그림을 그리지만 제가 그리는 산은 마음속 한국의 산일 것입니다.” 독일 집에 동양화·민화 관련 서적을 두고 틈이 날 때마다 본다고 밝힌 작가는 동양화의 여백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제 그림은 유화이지만 작품 안에 공기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구도나 물감을 통해서 여백을 주고 있어요.” 이 말은 그의 작업 과정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된다.

윤 작가는 사전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여러 작업을 동시에 시작해요.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이런 식으로 손을 대고 싶은 부분에 손을 대요. 어제 작업한 것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색으로 지워버려요. 회색 위에 빨간색을 덮으면 빨간색이라도 톤 다운되는 빨간색이 되는 거죠.” 몇 달씩 작업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사용한 색, 작가의 몸짓이 캔버스 위에 레이어로 쌓인다는 뜻이다.

“영어로 ‘토크 백(Talk back)’, 그림과 작가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 있어요. 그림이 ‘이번에 뭐가 필요하다’ 말을 하면 작가가 선이나 면을 더하는 거죠. 머리로는 여기에 색을 칠할까 했는데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제스처를 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충동적인 움직임이 그림을 살려요. 두 번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이 되는 것, 그게 그림의 삶인 것 같아요.”

윤종숙 작가가 벽화 작업을 하는 모습. 조현화랑 제공 윤종숙 작가가 벽화 작업을 하는 모습. 조현화랑 제공
윤종숙 'Autumn'(2022). 조현화랑 제공 윤종숙 'Autumn'(2022). 조현화랑 제공

‘색상과 선, 면을 쓰는 데 있어서 규칙도 제한도 없음.’ 윤 작가가 말하는 자신의 작업 스타일이다. “한국에서 미대를 안 나왔거든요.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독일 표현주의 전시를 봤는데 독일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3년 독일을 방문한 윤 작가는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한 연구실 앞에 붙은 ‘프로페서 남준 백’ 문패를 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유학을 결정했다. “그런데 실제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백남준 작가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하하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캔버스의 느낌이 다르다. “젯소가 안 발린 것을 사요. 수제 젯소를 발라 자연스럽게 린넨의 질감이 배어나오는 것을 좋아해요.” 윤종숙 작가는 다시 태어나도 ‘그림을 그리는 회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저라는 사람의 감성, 제가 가진 미적 개념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이 행복해요. 기회가 되면 엄청나게 큰 공간을 벽화로 채우고 비우는 설치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동양의 미를 잘 사용하면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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