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플렉시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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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소설가

지난달 나는 기후 위기 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단체의 강의를 들었다. 늦은 저녁이라 강의실에는 간단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주메뉴는 채식 김밥이었고 곁들이로 채소 스틱과 두부 마요네즈,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 대추가 나왔다.

강의 내용도 주로 나와 지구를 살리는 채식, 미래 희망 밥상에 대한 것이었다. 육식 산업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처럼 익히 아는 내용으로 시작해 구체적인 실천까지 이어졌다. 함께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된 것도 있었고 알게 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알게 되면 하나라도 실천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내용보다는 전달 방식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강의를 듣는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열린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간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강의 내용이 자꾸 도덕적 선택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 불편했다. 채식은 평화고 육식은 폭력이라는 도식에 의문이 들었다.

강의 도중 강사는 죽은 동물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먹는 것이라고 했다. 꿀은 누군가 게워낸 토사물이라고 했다. 지느러미가 잘린 채 바다에 버려지는, 피 범벅된 고래 사진들은 고개를 돌리게 했다. 현실은 그것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게 강의는 이래도 먹을 거야? 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결국 네 몸도 망하고 지구도 망할 거라는 절대 선에 대한 확신이 내게 쉽게 닿지 않았다. 육식을 먹는 나의 문제를 넘어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사회적 먹거리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점도 아쉬웠다.

얼마 전에 읽은 ‘플렉시테리언’(이안리)이라는 소설 한 편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 지오는 낮에는 동물구조센터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동물 안락사와 방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밤이면 인간을 위한 진드기 연구 자료를 채집하기 위해 야생동물을 포획한다. 또 함께 사는 여자친구의 영향으로 채식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이다.

플렉시테리언은 엄격한 수준의 채식을 실천하지 않으며 채식주의자 중 가장 낮은 단계의 식습관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로, 유연함을 듯하는 플렉시블(flexible)과 베지테리언(vegerarian)의 합성어이다. 지오는 채식주의를 욕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같이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단어를 이용한다. 그리고 채식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듯 자리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채식을 강요받은 적은 없었지만 고기를 먹는 날이면 눈치를 본다. 이 모순 안에 내 모습도 있는 것 같았다.

환경 운동가 레이철 카슨은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에 대해 말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이 살 수 없고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새가 살 수 없다. 이처럼 채식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다. 그 높이만큼 그것을 전달하는 태도에 대한 감수성 또한 높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어렵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려 깊음과 조용한 자기반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상을 이등분하는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서든지 모두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내가 이 글을 통해 하고 있는 말들이 또 누군가에는 폭력적일 수 있겠다 싶다. 가을이다. 무수한 생명이 풀숲에서 달까지 튀어 오르는 이 밤에 나부터 조용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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