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합의의 압박, 반의사불벌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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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법무법인 예주 대표변호사

일본서 실패한 법안 베낀 허점투성이
피해자만 합의하면 처벌 면할 수 있어
가해자 보복살인 등 강력 범죄 이어져
스토킹 사건 대부분 경찰 단계서 종결
윤석열 대통령 관련 법 폐지 공약
수사기관 피해자 보호 적극 개입해야

형사재판을 담당하면서 변호사로서 간혹 손 안 대고 코 푸는 사건이 있다. 재판을 앞두고 의뢰인이 갑자기 피해자와 합의를 해서 공소기각 처분이 되는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다. 형법상 폭행, 협박, 근로기준법상 임금 체불 등 일부 범죄가 반의사불벌죄로 규정되어 있다. 다만, 합의로 사건이 종결되다 보니 반의사불벌죄는 조금 가벼운 범죄라는 인식이 들기 마련인데, 최근 제정되어 시행된 ‘스토킹처벌법’에도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은 그 입법 취지를 고려할 때 좀 의외라고 생각된 부분이었다.


스토킹처벌법으로 입건된 가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의 합의서가 있으면 처벌을 면하다 보니,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또다시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달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은 스토킹처벌법에 있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의 그늘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가해자는 합의를 해 주지 않는 피해자에게 “내 인생 망치고 싶냐”고 협박성 메시지를 3개월간 보냈고, 피해자가 합의에 응하지 않자 재판 선고를 앞두고 피해자를 찾아가서 보복 살인을 했다. 반의사불벌죄 조항으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합의를 압박하고, 피해자는 보복이 두려워 진정한 의사에 반해 합의하게 되는 상황까지 일어나고 있다.

반의사불벌죄는 1953년 9월 18일 형법을 제정할 때 새롭게 만들어진 범죄유형이다. 반의사불벌죄의 연혁을 살펴보면, 1940년 3월 일본 개정형법 가안에 들어 있던 내용인데, 정작 일본은 개정형법에서 반의사불벌죄를 규정하지 않았다. 즉, 일본이 검토하다가 제외한 내용을 우리가 끌어다가 유일하게 쓰고 있는 것이고, 외국 입법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다.

물론 국가형벌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친고죄와 더불어 반의사불벌죄에 의해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와 화해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신속하게 평온한 상태를 회복하길 바라는 입법자의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괴리가 크다. 지난달 27일 대구에서 30세 남성이 고교 동창인 여성에게 스토킹과 협박을 일삼다가 흉기를 휘두른 사건에서도, 사건 발생 전 피해 여성은 경찰에 스토킹 피해 신고와 상담을 진행했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해자를 입건하지 못했고 피해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데, 결국은 강력 범행으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피해자의 처벌 불원의사표시를 가해자와의 이상적인 화해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극명히 보여 주는 사례다.

피해자의 고소대리인으로서, 데이트 폭력, 스토킹사건을 맡아 보면,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은 합의 여부를 결정할 때 극심한 고민을 한다. 합의를 해 주지 않아 가해자가 구속이 된다 하더라도, 짧은 기간 형을 살고 나와 보복을 할까 두려운 한편, 합의를 해 주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 또다시 접근할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 가해자와의 합의 여부와 후속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피해자의 몫이다.

최근 법무부가 밝힌 ‘경찰의 스토킹 범죄 관련 사건 접수 및 검찰 송치 현황’을 보면,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한 사건은 16.54%로 대부분이 경찰 단계에서 종결된다. 이는 피해자가 피해 보상, 접근 금지 등을 전제로 합의를 하거나, 보복이 두려워서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주로 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스토킹범죄의 특성상 가해자의 보복으로부터의 보호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상 피해자로서는 가해자의 합의 압박을 뿌리치기가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4월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법무부가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의 업무보고를 했다고 밝혔지만, 그간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최근 신당역 사건이 발생하고서야 국회는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 논의에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스토킹 피해자의 신변 보호에 대한 국가책임제 시행, 교제폭력 피해자 보호 사각지대 해소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이행은 더이상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스토킹범죄는 하루아침에 신고가 이루어지는 범죄가 아니다. 피해자는 참고 참다 신고에 이르는 것이고, 그간의 사례만 보더라도 순식간에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스토킹 범죄의 특성상,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여부를 오랜 시간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손에만 맡길 것이 아니다. 수사기관이 피해자 보호에 적극 개입하여 다시는 피해자가 신고를 하고서도 가해자의 손에 더 큰 화를 입는 일은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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