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의 월드 클래스] 푸틴의 자승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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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기자

2014년 2월 27일. 친러 무장 세력이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와 지방정부 청사를 기습 점령했다.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우크라이나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 정부가 친서방 행보에 속도를 내자 크림반도를 독립시키려 한 것이다. 곧이어 취임한 세르게이 악쇼노프 총리는 러시아에 보란듯이 ‘SOS’를 쳤다.

그해 3월 1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최종 귀속시켰음을 알렸다. 군사 투입, 합병 투표 등 하나의 땅을 차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0일. 이 모든 과정은 마치 각본을 짠 듯 흘러갔다. 러시아의 군사·정치적 맹위에 국제사회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8년 후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미사일 공격을 하며 침공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후 계속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루한스크의 정부군-친러 반군 간 전쟁이 도화선이 됐다. 당시 러시아 가용 병력 95% 가까이 투입된 전면전에 우크라이나가 8년 전처럼 며칠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크림반도 때의 ‘합병 공식’도 그대로 적용했다. 친러 지역을 대상으로 주민 합병 투표를 조기 실시했고, 유럽행 천연가스관을 볼모로 서방의 간섭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8개월 지난 현재, 일진일퇴를 거듭한 전쟁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4개 지역의 합병을 선언했지만, 우크라이나에 점령지를 다시 내주고 있는 형국이다.

푸틴 대통령의 결정적 패착은 잇단 무리수로 국제사회의 결집을 부채질한 것이다. 유럽 최대 규모 자포리자 원전을 폭격하고 가스 공급 중단으로 전 세계 인플레이션을 촉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경제 제재에 그치던 미국은 ‘하이마스’(HIMARS) 등 차원이 다른 무기와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했다. 또 러시아의 예비군 동원령은 역대급 내부 반발을 일으켰고 철옹성 같던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타협 없는 강경 대응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우크라이나는 8년 전 권력이 분산된 과도정부가 아니었을 뿐더러 군사 대응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만행을 시시때때로 전 세계에 메시지화하는 노련한 외교력을 보이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크림반도 합병이 우크라이나에게는 약이, 러시아에게는 자만심을 심어준 독이 된 셈이다.

달리 보자면 출구전략을 잃은 푸틴 대통령의 전술핵 발언은 그래서 위협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푸틴 대통령이 또다시 무리수를 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방이 무조건적으로 대화의 창을 닫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마침 다음 달 12일부터 G20 정상회담이 열린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이들을 위해 한 줄기 희망이 전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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