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말의 품격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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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부장

‘마약 김밥’ ‘마약 떡볶이’ ‘마약 옥수수’….

언제부터인지 ‘중독성이 있을 정도로 아주 맛있다’는 뜻으로 음식 앞에 ‘마약’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다. 식음료 분야에서 주로 쓰던 이 표현은 다른 상품군까지 확대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앞으로 ‘마약’이라는 단어로 관심을 모으는 일명 ‘마약 마케팅’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할 것 같다.

지난 17일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현재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돼 국회에서 논의 중”이라며 “법 개정 이후 후속 절차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정안에는 마약과 같은 ‘유해약물·유해물건과 관련한 표현’을 사용하는 표시 또는 광고가 사회윤리를 현저하게 침해할 수 있어 이를 금지하는 규정이 들어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상품 광고 문구, SNS 영상·글 제목이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유튜브나 블로그 등 개인 채널에서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시작된 자극적인 단어 사용 경쟁에 이제 지상파방송, 종합편성채널까지 대놓고 뛰어들었다.

얼마 전 자주 보던 인문 교양 프로그램에 MC가 “오늘은 대한민국 최고의 ‘역깡’과 ‘미깡’이 나와 지식 배틀을 한다. 기대해 달라”고 소개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역사와 미술 전문가인 두 사람이 영상에 등장한 나라의 역사, 문화적인 배경을 재미있게 설명한다. 생생한 현지 영상에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해설이 더해지니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몰입될 정도로 내용이 좋았다.

이 좋은 프로그램을 망친 건 안타깝게도 단어의 선택이다. 방송사가 출연자의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단어가 ‘깡패’이다. 굳이 ‘역깡(역사 깡패)’ ‘미깡(미술 깡패)’이라고 소개했어야 했나. ‘폭력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뜻의 ‘깡패’가 왜 뛰어난 능력자를 칭하는 말이 되었나. 이를 뜻하는 다른 단어들이 여러 개나 있는데도 말이다.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 과정에 다수 사용자의 올바른 합의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시청률 혹은 조회수라는 불순한 의도로 말을 함부로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어떤 어휘를 사용하는지가 때로는 한 사람의 인격과 사회의 품격을 좌우하며, 삶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자극적이고 거칠어지는 말은 결국 우리 삶에 위협으로 돌아온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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