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이 남도 들판에서 죽창을 든 까닭은?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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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 이판식

1894년 12월. 전남 장흥을 가로지르는 탐진강은 붉은 피로 물든다. 장흥 석대들에 집결한 동학농민혁명군 3만여 명은 일본군, 관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 하지만 신식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괴멸된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초들의 간절한 바람은 그렇게 석대들에서 서럽고 서러운 최후를 맞는다.

‘태풍으로 배가 뒤집어질 판인디 썩은 돛대 같은 주자 성리학만 붙잡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네. 아니 자네들은 그 알량한 주자학으로 무식한 백성을 부리고 사는 것이 편한께 그라는 것이 아닌가? 안 그란가? 이대로 양반행세하고 아랫것들 부리면서 사는 것이 자네들한테 편한께 그런 것이 아닌가 말이여?’

새 세상 염원하는 민초들의 삶·고뇌 담아

동학혁명 격전지 장흥 석대 전투 등 묘사

탐진강은 발원지인 전남 영암 금정산에서 유치와 장동을 지나 장흥읍 석대들을 적시고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소설 〈탐진강〉은 그 강을 배경으로 당시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고(事人如天)’ ‘있는 놈 없는 놈 함께 사는 세상(有無相資)’을 꿈꿨던 민초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

‘사람은 저마다 하늘의 명을 받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라오. 그런 하늘의 이치를 세상 사람들이 편하자고 신분을 만들어 귀천으로 구분한 것이요. 다시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요, 양반이나 상민이나 천민이나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보오.’

소설은 남도 동학의 풍운아 이방언 장군의 생애를 중심으로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소설은 1893년 겨울, 부용산에 오른 장흥접주 이방언 일행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이방언 장군은 이곳에서 한 해 전, 장흥 유림에서 파문된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유림에서 쫓겨나기를 불사하면서도 동학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이방언 장군은 다양한 신분과 배경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이듬해 동학혁명 4대 격전지 중 하나인 장흥 석대들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탐진강과 석대들이 지켜보는 그 전장에서 수많은 농민군과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저자인 이판식(세무법인 비케이엘 대표세무사) 전 광주국세청장은 장흥 출신이다. 8년여에 걸친 문헌 조사와 현장 답사, 인터뷰 등의 고단한 작업을 거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뛰어난 학식을 겸비했던 이방언 장군이 어떤 계기와 고민을 통해 동학에 투신하며 장흥부 대접주가 되었을까. 그리고 그와 함께한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이 바라본 당시 사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소설을 읽다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와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잊지 않아야 잃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탐진강〉을 통해 과거로부터 배우는 현재, 현재를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남도 끝자락 탐진강 석대들에서 쓰러져 가는 조선을 지키고자 죽창을 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의 고결한 함성과 숭고한 정신은 후세를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한다. 이판식 지음/호밀밭/396쪽/1만 6000원.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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