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세대 문학의 표준어주의, 한국 문학사의 불행”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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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역문예론 / 임우기

〈유역문예론〉은 상당한 지적, 영성적 광휘를 품은 책이다. 신명나게 읽힌다. ‘유역문예론’은 문학평론가 임우기의 10년, 아니 20년 공력이 들어간 새로운 문예론이다. 유역은 지역과 비슷한 말인데 지역은 중앙과 대립하니까 ‘유역’을 사용했다. 낙동강·한강·영산강·금강 유역의 예가 있고,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유역도 있을 것이다. 유역은 ‘인접한 지역들의 연합’으로, 새로운 이론이 태동하는 그곳이다.

유역문예론은 조선정신의 잃어버린 근원, 자재연원(自在淵源)을 찾아 단군신화와 동학을 연결시킨다. 루카치는 서사시를 쓴 고대 그리스를 총체성의 시대라고 했다. 루카치의 고대 그리스에 맞먹는, 우리에게도 ‘창조적 유기체론’의 전범 시대, 이른바 총체성의 시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단군신화 시대다. 그것이 우리의 거대한 뿌리라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 얼이요, 정신의 뿌리, 한국인의 신화적 원형을 이뤘는데 사상가 김범부가 밝혔듯 신라 풍류도로 이어지는 그것은 신도(神道)다. 한민족은 황하문명권과 다른,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여러 북방계 종족들이 어울린 ‘동북아 퉁구스 문명권’의 큰 나무다.

중앙집권적 문학 의식 ‘표준어주의’ 비판

방언 잘 구사한 백석 ‘선구적 시인’ 평가

단군신화·동학과 연결 짓는 ‘유역문예론’

서구적 근대성 극복하려는 새로운 문예론


임우기의 ‘유역문예론’은 일방으로 기울어진 서구적 근대성을 초극하려는 새로운 문예론이다. 그 입장에서 탁월한 경지를 품은 작가로 언급된 인물들. 왼쪽부터 홍명희 백석 박경리 김수영 이문구 김성동. 부산일보DB 임우기의 ‘유역문예론’은 일방으로 기울어진 서구적 근대성을 초극하려는 새로운 문예론이다. 그 입장에서 탁월한 경지를 품은 작가로 언급된 인물들. 왼쪽부터 홍명희 백석 박경리 김수영 이문구 김성동. 부산일보DB

그런데 19세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수운의 동학 창도이다. 동학이 창도된 결정적 계기는 수운의 귀신 체험이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을 모르니 귀신이란 것도 나이니라.” 수운이 한울님과 두 번째 접신을 하면서 들었다는 말이다. 이 ‘귀신’이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이 침전된 단군신화의 무(巫)라는 것이다. 저자는 “수운 동학은 옛 사상들을 창조적으로 회통하여 인류사적인 새로운 큰 사상을 세웠다”고 말한다. 저자는 김지하에게서 동학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한울님 모심의 존재(侍天主)’로서 유기체적 세계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동적 존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성실한 시인·예술가를 새로운 무(巫), 네오 샤먼에 비유한다. 작가는 성실한 절차탁마 끝에 자신도 모르게 귀신이 들고 나는 창작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동학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 개념이 수심정기(守心正氣)인데 시와 소설, 모든 예술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유역문예론 입장에서 백석을 근대문학사의 선구적인 개벽 시인이라고 본다. ‘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은 11자 주문처럼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친다는 것이다. 김수영 신동엽 김구용도 대단한 시인으로 본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백석의 경우, 방언을 절묘하게 구사했다. 4·19 세대는 서구 근대적 문예이론에 경도돼 박정희의 표준어주의에 함몰됐는데 김승옥 이청준 황석영의 글이 그 예다. 4·19 세대 문학의 표준어주의는 중앙집권적 문학 의식이 낳은 한국문학사의 불행한 사태라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박경리 〈토지〉, 홍명희 〈임꺽정〉, 이문구 〈관촌수필〉, 김성동 〈국수(國手)〉를 대단한 소설로 꼽는다. 박경리가 〈토지〉를 쓸 때 작품 속 아이와 함께 며칠을 앓았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토지〉는 수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삶과 마음을 헤아리며 쓴 생명적 관점의 소설로,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서구적 방식의 플롯을 넘어서 있다고 한다. 홍명희 이문구 김성동의 인위적 형식을 훨씬 넘어서 있는 작품을 쓴 작가다. 한강 〈소년이 온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도 좋은 소설로 언급한다. 또 ‘공후인’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천도하는 노래로 한국시의 아득한 원형이라고 보고, 중간에 동학 주문 21자의 중요성을 갈파한 만해 한용운의 통찰도 소개한다. 그 주문 중 저자는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7자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저자는 서양의 경우, 그는 신과 인간, 죄와 벌, 악령과 구원 등 근본 문제를 천착한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카프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동학에서는 인간은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로 본다. 근대 이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최령자로서의 인간 존재로 인식론적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최령자는 서양 근대의 개인주의적 자유를 보장받은 이성인보다 더 높은, 근원적인 차원의 인간 존재 개념이다. 동학과 개벽은 ‘일방으로 기울어진 근대성’을 초극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한다.

책은 3편 글로 유역문예론을 대담을 통해 밝힌 1부, 9편 글을 실은 2부 시론, 5편 글을 실은 3부 소설론, 5편의 글을 실은 4부 영화·미술론으로 이뤄져 있다. 홍상수 권진규 기형도 신동문 송경동 등 문예인들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언제 이리 널리 읽고, 언제 이리 깊이 사유하여, 이처럼 독자적 논을 세웠는지 놀랍다”고 했다. 임우기 지음/솔출판사/924쪽/5만 3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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