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첨성대에서 ‘신라의 가을’을 만나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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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산책로와 불국사 붉게 물들인 단풍
동궁과 월지는 한가로운 산책 즐기기 제격
첨성대 인근 반월성 숲, 계림은 한 폭 그림

경주를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계절은 단연코 가을이다. 불국사, 첨성대, 동궁과 월지 주변에는 산과 숲, 정원이 많기 때문에 알록달록한 단풍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많은 사람이 낭만의 사진을 찍으러 가는 가을의 경주를 만끽해보자.


첨성대. 첨성대.

■토함산 자연관찰로

불국사 오른쪽에는 석굴암까지 갈 수 있는 자연관찰로가 있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1시간~1시간 30분이면 석굴암에 도착할 수 있다. 올라갈 때는 걷고 내려올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와도 된다.

안내소를 지나자마자 갈색과 노란색으로 진하게 치장한 자연관찰로가 나타난다. 자연관찰로 중에서 약수터까지의 1km 구간은 단풍길이다. 1981년에 불국사청년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단풍나무, 참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 380여 그루를 심어 환상적인 낭만의 산책로를 만들었다.

가파르지 않고 잘 정돈된 길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은 구간이어서 자연관찰로를 걷는 사람은 적지 않다. 평일 오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길을 오르는 걸 보건대 주말에는 인파가 엄청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토함산 자연산책로. 토함산 자연산책로.

나뭇가지와 잎은 터널처럼 하늘을 가을의 색으로 뒤덮었다. 자연관찰로의 흙도 갈색인데다 알록달록한 나뭇잎이 덮인 곳이 많아 어느 게 나뭇잎인지, 어느 게 흙인지 착각할지도 모른다. 산책에 나선 여행객들의 얼굴도 빨간색이나 갈색이다. 황홀한 풍경에 반해 얼굴이 달아오른 것인지, 나뭇잎에서 흘러내린 향기에 얼굴이 염색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난 9월 태풍 때문에 산길 일부 구간이 무너져 지금 자연관찰로 일부 구간은 통제된다. 석굴암까지 바로 갈 수는 없고 입구에서 800m 지점인 약수터 인근에서 걸음을 멈춰야 한다. 아쉬운 표정만 남긴 채 발길을 돌리는 순간 모든 산책객의 입에서는 희열에 넘친 탄성이 튀어나온다. 올라올 때보다 내려갈 때 자연산책로의 풍경이 더 찬란하고 눈부시다. “여기가 바로 불국토로구나!”


토함산 자연산책로. 토함산 자연산책로.

■불국사의 단풍

불국사 입구 연못에는 파란 가을하늘이 담겼다. 연못 주변을 둘러싼 단풍나무는 하늘이 무얼 하면서 놀고 있는지 고개를 힐끗 내밀고 연못을 들여다본다. 순식간에 연못은 파란색, 갈색, 빨간색, 녹색으로 다채롭게 물든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길목의 돌다리 ‘해탈교’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진 모양이다.


불국사 해탈교. 불국사 해탈교.

불국사는 이미 깊은 가을에 푹 젖었다. 사찰 곳곳에서는 경건하게 짙어가는 계절의 향기가 흐르고 있다. 사찰 가장 아래의 좌경루는 물론 가장 위쪽에 자리를 잡은 비로전과 관음전, 총지당 지붕에는 가을이 앉아 쉬고 있다. 빨간 단풍나무는 가을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가지를 지붕 곳곳으로 뻗어 사람의 시선을 가려준다.


불국사 경내의 단풍. 불국사 경내의 단풍.

대웅전과 무설전 앞에는 화분에 담긴 꽃이 다양하게 피어 있다. 노란 국화도 보이고 서양봉선화라는 임파첸스도 있다. 다양한 소원을 담은 표식이 화분에 꽂혀 있다. 가족 이름만 적은 표식도 있고, 수능 대박이나 사업 대길이라는 구체적 소원을 적은 표식도 보인다.

관람객들은 화사하게 피어난 단풍나무 아래에서 연거푸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다들 불국사 사찰 건물을 구경하러 온 것인지, 불국사 안팎에 만개한 가을을 보러온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는 장면이다.


불국사 후문 산책로. 불국사 후문 산책로.

■동궁과 월지

통일신라시대 별궁이었다는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는 한가롭다. 원래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가을에는 잡념을 모두 버리고 한가롭게 거닐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

이미 노랗게 색이 바래버린 잔디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표정이다.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잔디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선 모과나무만 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뿐이다. 가지에 대롱대롱 달린 모과 열매는 이대로 가을을 보내기 무척 싫은 모양이다.


동궁과 월지의 모과나무. 동궁과 월지의 모과나무.

1975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1980년 팔작지붕 누각으로 새로 지었다는 1호 복원 건물에 올라간다. 건물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동궁과 월지를 에워싼 작은 숲은 가을의 전령사인 단풍으로 뒤덮였다. 젊은 두 연인이 숲을 전세라도 낸 듯 작은 벤치에 붙어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그들의 대화에 방해라도 될까봐 나뭇가지는 물론 땅에 떨어진 나뭇잎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다.

복원 건물에서 내려와 여유를 가지고 월지를 한 바퀴 둘러본다. 작은 오리 여러 마리가 귀여운 물살을 일으키며 호수를 오간다. 작은 물고기 여러 마리는 오리가 사라진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수면으로 올라와 퐁당거리며 장난을 친다.


동궁과 월지 전경. 동궁과 월지 전경.

■계림과 첨성대

단순히 자동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피하기로 했다. 동궁과 월지에서 원화로를 건너 반월성 유적지와 참나무 숲길을 따라가다 계림을 둘러보고 첨성대에 가기로 했다.

신라시대에 성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해자를 건너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석빙고가 나타난다. 가을 햇살에 노랗게 익은 것처럼 보이는 석빙고 벽 너머로 짙은 갈색 참나무가 초병처럼 버티고 서 있다. 석빙고에서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고 왼쪽으로 갈 수도 있다. 오른쪽 길은 조금 더 빠르고 왼쪽 길은 숲을 더 즐길 수 있는 게 차이다.


석빙고. 석빙고.

반월성을 둘러싼 숲은 참나무 군락지다. 숲 너머로는 자연적 방어시설이던 남천이 흐른다. 숲은 그다지 크지 않아 천천히 걸어도 10~20분이면 첨성대까지 갈 수 있다. 숲 바닥에는 갈색 나뭇잎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깔려 있다. 일부러 숲으로 들어가 나뭇잎을 밟고 걸어본다. 너무 푹신해서 불편할 정도다. 신발 안으로는 잘게 부서진 나뭇잎 조각이 들어온다.


반월성 참나무 군락지. 반월성 참나무 군락지.

숲을 지나가면 계림이 나온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얽힌 곳이다. 오늘은 설화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계림은 가을에 화사한 사진 찍기 좋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게 난 장소다. 그곳에 가서 ‘인생 샷’ 한 장 찍는 게 목표다.

계림을 걷다 보면 멋진 사진을 찍을 장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하게 된다. 곳곳에 울긋불긋한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얽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고교 동창으로 보이는 여성 네 명은 만족할 만한 사진을 찍었는지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가득하다.


계림의 단풍. 계림의 단풍.

계림에서 잊지 못할 추억의 사진을 남긴 다음 마지막 행선지인 첨성대로 걸어간다. 이제 숲길은 끝나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온몸을 비춘다. 다행히 덥거나 뜨겁지는 않고 푸근하고 안온한 느낌을 준다. 첨성대 주변은 많은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하다. 한복을 빌려 입은 뒤 입장료를 내고 첨성대 바로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고, 인근 벤치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얼굴에 화려하게 너울지는 함박꽃 웃음이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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