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구산동 고인돌, 청동기와 철기 전환기의 거대 상징물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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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시가 유적 정비 공사를 하던 당시의 구산동 고인돌 모습. 김해시 제공 경남 김해시가 유적 정비 공사를 하던 당시의 구산동 고인돌 모습. 김해시 제공

제28회 가야사 학술회의 발표

철기 보급 상대적으로 늦은 김해

청동기 문화집단 토착성 강해

고인돌로 정체성 수호 의지 표현


구산동 고인돌 세부 성격 놓고

토착민 축조 최후의 1인 수장묘

공동체 제사 장소로 의견 갈려

김해분지 고인돌 3기 존재 ‘주목’


“구산동 고인돌은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로 넘어가던 기원전 3~1세기에 만들어진, 시대 전환기의 애틋한 상징물이다. 그것이 애틋한 것은 시작의 장대함보다는 외려 최후의 쓸쓸한 장엄함이 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이수홍·울산문화재연구원) 구산동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종언을 붙들려던 거대한 상징물이었다는 것이다.

350t 안팎 거대한 상석,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지석묘)인 김해 구산동 고인돌. 지난해 ‘훼손 홍역’을 치른 구산동 고인돌을 두고 지난달 28~29일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전문가 12명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김해시 주최,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주관의 제28회 가야사학술회의 ‘가락국, 청동기에서 철기로’가 그것이다.

학술회의 발표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 김해지역에 대한 철기 보급은 다른 지역보다 늦었다. 철기가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한반도 북부·중부·서부를 거쳐 1세기 이상 시차를 두면서 남부에 서서히 전해졌다는 것이다. 거리상 멀기 때문이다. 철기문화 전파가 급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김해지역은 상대적으로 기존 청동기사회의 토착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청동기시대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성장해온 토착 사회는, 장차 삼한으로 구분·발전해 나갈 ‘한(韓) 사회’로 뭉뚱그려 표현되기도 한다(권오영·서울대). 말하자면 고인돌은 ‘한(韓) 사회’의 상징물이다.

2021년 구산동 고인돌 아래 목관묘를 확인한 발굴 당시의 모습. 김해시 제공 2021년 구산동 고인돌 아래 목관묘를 확인한 발굴 당시의 모습. 김해시 제공

여하튼 새롭게 유입되는 철기문화와 맞닥뜨리면서 기존 청동기문화 집단이 토착 정체성을 지키려는 결집 의지를 거대한 구산동 고인돌 축조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상석은, 철기문화의 외지인에게 재지집단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자기 집단을 보호하려는 표현이었다는 것이다(윤태영·국립경주박물관).

그러나 역사적으로 청동기시대는 결국 철기시대에 자리를 내줬는데, 요컨대 지석묘(청동기) 단계에서 목관묘(초기철기)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 토착 고인돌 피장자를 구간(九干) 세력, 초기철기문화를 갖고 내려왔다는 목관묘 피장자를 수로(首露)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구산동 고인돌은 최후의 토착 구간 세력이 축조한 거라는 셈이다.

그런데 구산동 고인돌에 대한 세부적인 성격 규정에는 이견 차이가 있다. 하나는 구산동 고인돌은 토착민들이 축조한 최후의 1인 수장묘라는 것이다. 다른 견해는 구산동 고인돌은 1인 수장묘가 아니라 공동체 유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식 지석묘(고인돌), 즉 집단 제사 장소라는 것이다(이동희·인제대). 그러다가 최후의 제사장이 그 아래 묻혔다는 것이다. 2021년 구산동 고인돌의 거대한 상석 아래에서 목관묘가 확인됐다. 부장품은 기원전 2~1세기로 추정되는 옹형토기 1점, 두형토기 1점에 그쳐 거대 상석에 비해 빈약할 정도였다. 이 목관묘의 주인공을 최후의 군장으로 보느냐, 최후의 제사장으로 보느냐 하는 이견이 있다는 것이다.

김해분지 해반천 양쪽에 일직선을 이루며 놓여 있는 구산동-대성동-봉황대 3개의 고인돌(빨간 네모). 이성주 제공 김해분지 해반천 양쪽에 일직선을 이루며 놓여 있는 구산동-대성동-봉황대 3개의 고인돌(빨간 네모). 이성주 제공
묘역의 박석이 임의로 옮겨진 김해 구산동 지석묘 모습. 연합뉴스 묘역의 박석이 임의로 옮겨진 김해 구산동 지석묘 모습. 연합뉴스

또 주목할 것은 김해지역에 100여 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중 김해분지 해반천 양쪽에 희한하게 일직선을 이루며 두드러지는 3개의 고인돌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구산동 고인돌-대성동 고인돌-봉황대 고인돌이 그것이다. “일직선상의 3개 고인돌을 볼 때 김해 중심권역의 집단들이 분지 전체를 대상으로 문화경관을 조성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성주·경북대)는 것이다. 그러다가 중심이 대성동과 봉황대로 옮겨가고, 이곳에 국읍(國邑)이 형성됐는데, 이런 양상이 금관가야 전신인 구야국이 형성된 구체적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또 구산동 고인돌의 350t 거대 상석과 관련해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보는 입장과, 자연적으로 이곳에 있었을 거라는 입장으로 나뉘기도 했다. 어쨌든 구산동 고인돌은, 김해지역 핵심 세력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던 시대 전환기의 돌올한 상징물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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