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일기] 방관과 묵인이 빚어낸 참사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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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카메라 무용지물
통학로 개선 요구에 늑장
유도봉 설치 설득도 못 해
영도구청, 해결 의지 있나

지난달 28일 부산 영도구 청학동의 한 스쿨존에서 초등학생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현장. 정종회 기자 jjh@ 지난달 28일 부산 영도구 청학동의 한 스쿨존에서 초등학생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현장. 정종회 기자 jjh@

“조금만 더 빠를 수는 없었나요?”

지난달 28일 부산 영도구 청학동 등굣길 참사 이후 영도구청이 각종 대책을 쏟아낸 것을 본 청동초등학교 학부모 말이다. 만약 구청이 일찍이 통학로 안전 확보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했다면, 고 황예서(10) 양의 비극적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참사는 갑작스럽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고 업체가 화물을 내리던 곳에는 구청이 운영하는 단속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주정차가 금지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버젓이 컨테이너 차량을 대고 물건을 내리는 모습을 구청도 지켜볼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참사 이후 취재가 시작되니, 구청 관계자는 해당 단속 카메라가 불법 주정차 단속이 아닌 폐기물 무단 투기 감시·방범용 등으로 작동한다고 답했다. 결국 구청은 눈만 뜬 채 사고 위험성을 방관하고 있었다.

통학로 개선을 요구하는 공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구청의 무심함은 나타났다. 지난해 4월 청동초등은 학교 주위에 만연한 불법 주정차 단속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공문을 받은 구청은 지난 1년 동안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불법 주정차 단속 카메라는커녕 비교적 손쉬운 시선유도봉 설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구청이 사고 위험성에 대해 방관을 넘어 묵인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해당 통학로를 다녔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기어코 참사가 발생했고, 한 가족의 일상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취재진은 몇 번이나 평소 예서가 다녔을 통학로를 따라 걸었다. 참사가 발생한 통학로 말고도 주거 단지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더욱 심각했다. 보·차도 구분이 없어 보행자가 눈치껏 차를 피해야만 했다.

안전 없는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아이들은 수년간 학교에 다녀야 하는 처지다. 급경사지를 낀 다른 어린이보호구역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또 다른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해 구청 역할이 막중한 이유다.

지난 며칠간 구청도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다. 실제 지난 4일 구청이 단기 대책으로 내놓은 시선 유도봉 설치 공사는 주차난을 호소하는 일부 주민 반발에 부딪혀 중단되기도 했다.

일찍이 차근차근 대책을 추진했으면 최소화할 수 있었던 반발이라 아쉬움은 더욱 크다. 이제까지 구청이 미룬 숙제가 한 번에 쏟아지며 잡음이 발생하는 모양새인데, 타협 없이 끝까지 대책을 이행해야 한다.

한 시민은 이번 참사에 대해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하필 등교 시간에 하역 작업이 있었고, 하필 굴러간 화물이 등교 중인 예서 양을 덮쳤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참사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취재할수록 그 말에 의구심이 생겼다. 사고 업체의 1차적 책임을 뒤로 하고, 참사를 경고하던 그 많은 순간 중 한 번이라도 어른들이 진심을 갖고 문제를 들여다 봤으면 어땠을까? 이제야 청동초등 일부 통학로의 일방 통행 지정 여부를 논의하는 경찰도 그 물음에 답할 의무가 있다.

영도구 전역에서 어린이보호구역 실태조사가 이뤄지는 만큼, 이제라도 학부모와 아이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구청과 경찰이 부디 제 역할을 다하길 기대한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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