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막사서 혹독한 담금질… 50만 장병 배출, 조국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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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 빼앗긴 정부
안정적 병력 투입 필요성 절감
대구 25연대 제주 모슬포로 옮겨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 톡톡
비바람에 물 부족 악조건서 훈련
마음 다독일 강병대 교회도 건립
마침내 서울 재탈환 발판 마련

6·25 전쟁 당시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대정 부녀회원들이 주먹밥을 나눠 주고 있다. 향토사학자 김웅철 제공 6·25 전쟁 당시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대정 부녀회원들이 주먹밥을 나눠 주고 있다. 향토사학자 김웅철 제공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란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하며 중차대한 역할을 다했다.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후방 핵심 전략기지 육군 제1훈련소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의 환경은 열악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천막으로 건물을 대신하는 거대한 천막도시 같은 모습이었다.

훈련소 면적은 198만㎡(약 60만 평) 규모.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1931년부터 군사기지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쓴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은 그대로 사용됐다.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날로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사상자가 늘어나자 육군은 부족한 병력을 빠르게 보충해야 했다.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 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

훈련소가 들어선 모슬포의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돼 물이 부족했다. 또 바람이 많이 불어 훈련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해군 상륙함과 수송선은 전남 화순군 항만대 해안으로 오가며 장병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그런데 연중 비바람이 심한 탓에 배가 다닐 수 있는 날은 90여 일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신병과 훈련 장병 수송에도 지장이 많았다.

육군 제1훈련소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1956년 1월 해체될 때까지 장병 50만 명을 배출하며 후방의 핵심 전략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도 훈련소 정문 기둥과 지휘소, 의무대 등의 일부 시설이 남아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이 훈련 받았던 건물과 세면장 등도 남아 있다. 이 시설은 등록문화재 410호로 지정됐다.


위로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남은 옛 육군 제1훈련소 정문 기둥, 지휘소와 내부. 대정여고에 있는 제98육군병원 건물. 제주일보DB 위로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남은 옛 육군 제1훈련소 정문 기둥, 지휘소와 내부. 대정여고에 있는 제98육군병원 건물. 제주일보DB

모슬포에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조성되자 피란민이 주위에 몰려들면서 모슬포는 군사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훈련병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의 군용물품이 거래됐다. 모슬포 주민은 삶은 고구마를 배고픈 훈련병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피란민은 모슬포 중심에 위치한 용천수인 신영물을 물지게로 길어 사용했다. 인근 도로변에는 고구마와 보리떡 등 간식을 파는 즉석 판매장이 들어섰다. 대정부녀회 회원들이 신영물 취수장 인근 빨래터에서 많은 훈련병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을 빨래해 주며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육군 제1훈련소가 후방 핵심 전략기지로 자리를 잡자 정부 고위 인사, 장성이 잇따라 방문해 훈련을 참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모슬포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는 ‘워커 운동장’으로 불린다. 워커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한 기념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사관학교도 대정읍으로 이전해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1951년 2월 1일~4월 23일 80여 일의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됐지만 공군 장교 후보생 1000여 명을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대정초등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다. 지역 주민은 이것을 ‘보라매탑’이라고 부른다.

육군 제1훈련소 창설 이듬해인 1952년에는 의무대와 후송병원을 맡았던 제98육군병원이 대정읍에 설치됐다.

당시 제주도민과 피란민을 치료한 제주 유일 3차 의료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던 이 병원에는 병동 50여 개가 지어졌다. 대정여자고등학교가 1964년 3월 개교한 이후 병동 건물은 차례로 철거됐다. 지금은 본건물 한 채만 남았다.


■훈련병 다독인 ‘강병대 교회’

육군 제1훈련소 설치 이후 교회가 대정읍 상모리에 건립됐다. 치열한 전선에 투입될 장병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당시 훈련소장을 맡았던 장도영 장군은 강한 병사를 육성하자는 취지로 교회에 ‘강병대(强兵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쟁이 한창인 시기여서 전문 기술자가 아닌 국군 공병대가 교회를 건설했다. 강병대 교회는 제주 현무암으로 지었다. 예배당 595㎡, 교육관 51㎡로 전체 건물 면적은 646㎡ 규모였다. 건립 당시에는 목재 골조 위에 함석 지붕을 씌운 데 불과했지만 2006년 보수공사가 벌어져 지붕과 교회 첨탑이 새롭게 단장됐다. 지금도 교회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제주의 군사 유적지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2002년 등록문화재 38호로 지정됐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육군 제1훈련소는 빠른 병력 수급을 위해 훈련 기간을 12주에서 3주로 단축하는 대신 엄혹한 훈련을 이어 갔다.

혹독한 훈련에 심신이 지친 데다 연일 들려오는 전선 소식에 극도의 두려움을 갖게 된 훈련병은 강병대 교회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용기를 얻었다. 제주로 온 피란민도 강병대 교회에 마음을 의탁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강병대 교회는 주민을 위한 교육 공간이자 대민봉사 기관으로도 활용됐다. 모슬포 지역의 첫 유치원인 샛별유치원이 1952년 이 교회에서 태동했다. 인근 모슬포 중앙교회와 모슬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고등교육을 받은 군인은 어린이를 가르쳤다. 연말이면 전쟁고아를 위해 산타할아버지로 변신해 옷과 신발 등을 선물했다.

강병대 교회는 전쟁이 끝나고 12년 후인 1965년 공군 8546부대로 편입돼 기지 교회로 새롭게 출발했다.

1966년에는 교회 부설 야간 중학교인 신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됐다. 이 학교는 1981년 폐교될 때까지 졸업생 200여 명을 배출했다.

김두영 제주일보 기자 kdy84@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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