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목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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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예전에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 물러나면 지역민들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일종의 공덕비나 선정비dl다. 현재 부산에는 이런 공덕비가 50개 정도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얼이 살아 숨쉬고, 이름이 가장 빛나는 이로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꼽을 수 있다. 송상현 공은 왜적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오자 백성들과 합심해 항전했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왜군의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감동 받은 그 장렬한 전사에 훗날 ‘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송공사(현 충렬사)를 세워 모셨다. 오늘날 ‘송상현광장’ ‘충렬부대’와 같이 공원이나 거리, 부대 명칭 등에 이름과 시호가 쓰이는 것은 그 분의 애국충절을 흠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받쳐 일한 목민관을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고 그 얼을 숭상하고 있다.

충렬공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퇴임 이후 뒷모습이 아름다운 목민관이 더러 있었다. 동래부사 민영훈이 대표적이다. 1835년 동래와 양산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때 민 부사는 1000포대의 쌀을 풀어서 1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은 민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직무를 보던 동헌(동래구청)에서부터 동래의 첫 검문소인 기찰(금정구청 앞)까지 줄지어 서서 적삼을 벗어 민 부사가 밟고 가도록 배웅했다고 한다. 지난날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그 발걸음을 사뿐히 걸어갈 수 있도록 배웅한 민초들의 배려가 너무나 감동적이다.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일본 대마도에서 최초로 고구마를 가져왔던 조엄 선생도 애민 정신이 돋보인 목민관이었다. 그는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순직한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의 공적을 발굴해 충렬사에 봉안했다. 범어사 승려들이 수도를 정진할 수 있도록 노역을 감면해 주는가 하면, 백성들의 면포 납품의 부담을 줄이는 등 항상 백성 편에 서서 과도한 세금과 과잉 행정을 바로잡는 선정을 베풀었다.

조엄 선생이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1763년 8월 20일 동래부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부사로서 이미 동래를 떠난 지 4년이 흐른 때였다. 당시 군 장교, 아전, 승려 등 주민 수백 명이 조엄 선생이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생을 맞이하러 고을 경계까지 나갔다. 선생이 나타나자 이들은 가마를 막아서고 말을 붙들어 앞을 다투어 가는 길을 위로했다. 조엄 선생도 잠시 수레를 멈추고 농사 일에서부터 지역민들과 대화를 한동안 나누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일찍이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애민사상을 강조하며 ‘재난에서 구하는 일’도 애민의 일환으로 본다고 했다. 이런 일은 파란 눈의 이방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는 아주 비참했다. 이재민이 무려 3만 명에 달했다. 당시 리차드 위트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은 군법을 어겨가며 군수품을 꺼내 이재민을 도왔고, 전후 복구 사업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는 한국인이 존경하는 파란 눈을 가진 푸른 제복의 목민관이었다. 전역 후에는 이 땅에 남아 유난히도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사랑한 휴머니스트로 살았다. 죽어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병사들과 함께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유일한 장군이었다.

부산역 화재가 나고 70년이 흐른 지금도 부산 시민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성을 모아 고아들에 둘러싸인 장군의 동상을 만들기 위해 모금 활동 등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스스로 감동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부산을 사랑과 풍미로 가득한 역사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목민관의 휴머니즘이 자리한 곳에는 시대를 초월해 진한 감동이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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