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동아시아 지중해의 공생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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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시바 료타로 ‘흑조권’ 문화
해역의 공생 원리 깨우쳐

바다는 지구 생명의 터전
물의 오염은 죽음과 파국

‘뜨거운 감자’ 후쿠시마 오염수
인간 중심 바다 착취 기도 반복

벌써 수년이 지난 일이다. 그 해 뜨거운 여름 노작가와 함께한 추리문학기행단 일행은 땀을 흘리며 오사카시에서 기차를 타고 히가시오사카시(東大阪市)의 한적한 역사에 내려 시바 료타로 기념관을 찾았다. 히가시오사카시는 시바 료타로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어서 그곳에 안도 다다오가 건축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주변부성의 가치를 지향한 두 사람은 모두 오사카 사람이다. 더군다나 오사카시의 동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온 조선인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 시바 료타로는 재일 사학자 강재언을 위시하여 김달수 등의 작가와도 교류하였다.

시바 료타로는 주지하듯이 언론인 출신 작가로 다독, 다작으로 유명하다. 사후에 6만 권의 장서를 남겼고 그 가운데 2만 권을 기념관에 배치하였다. 긴 회랑을 지나 기념관 내부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책장을 추상한 이미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안도 다다오가 장서가이자 다작가인 그의 속성을 잘 끄집어낸 대목이 아닌가 한다. 시바 료타로가 쓴 여러 책 가운데 〈언덕 위의 구름〉은 러일 전쟁 전후의 시기를 무대로 한 대하소설로 무려 2000만 부 이상 팔려 읽혔다. 일본인들이 역사서 대신에 이 책을 권할 정도로 국민문학을 대표한다. 작가의 뜻에 반하여 NHK가 ‘메이지 백 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드라마로 방영하면서 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가인 나카츠카 아키라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에 의문을 던진다. 조선이 빠진 ‘메이지 영광론’의 허구성을 간파하면서 시바의 조선관이 ‘조선정체론’, ‘조선낙오론’과 다르지 않고, 조선이 지정학적 위치와 본래의 무능으로 일본에 종속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왜곡된 인식을 지녔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시바 료타로의 조선관은 〈언덕 위의 구름〉을 매개로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의 정당화가 광범하게 일본인의 기억에 남게 하는 효과를 유발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15년 전쟁 시기의 일본 군국주의를 메이지의 배신 혹은 비정상 상태로 보는 그이지만 일본의 발흥과 조선의 몰락을 정당한 역사적 과정으로 서술한 데 많은 문제가 있다. 나카츠마 아키라의 지적처럼 그의 소설이 일본이 조선에 무엇을 했는가를 말할 필요가 없고 조선에서 어떠한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일본인의 정치적 무의식을 전파한 셈이다.

시바 료타로는 한편으로 소설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 여행의 글쓰기를 병행한 작가이다. 많은 조선 여행기 가운데 〈탐라 기행〉은 그의 주변부적 관심을 잘 대변한다. 이 책에서 그는 내셔널리즘은 어느 민족에게나 필요하지만 천박한 내셔널리즘은 노년으로 말하면 치매 같은 것이고 장년으로 말하면 자신 없음의 표현이며 젊은이의 경우는 단순한 무지의 표출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그가 기행 중에 ‘잠수어법은 제주 해녀가 일본 해녀들에게 가르쳤다’라는 말을 듣고 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아시아인이 고대적 마음의 넓이를 좀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것일까?’라고 자문한다. 여기서 그는 흑조권(黑潮圈)에서 문화를 만들어 온 여러 민족을 떠올린다. 쿠로시오(黑潮)는 필리핀 군도에서 일본 열도를 따라 북상하다 북미 서해안을 따라 흘러 회귀하는 해류이다. 바로 해녀 혹은 잠수어법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오키나와, 제주, 규슈, 세토나이카이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하며 나아가서 ‘흑조인’의 문화가 한반도 남해는 물론 황해 연안에 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시바 료타로는 제주 해녀가 칭다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경로를 알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바다가 가히 그들의 것임을 알게 되며 이로써 국가를 넘어선 해역의 공생 원리를 깨우친다.

바다는 어느 국가의 소유가 아니다. 오랫동안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었으나 오늘날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인류와 지구 행성의 생명이 공생할 터전이다. 지구 행성의 7할 이상이 바다이고 지구를 구성하는 물의 97%가 짠물이다. 담수와 해수는 인간의 관점에서 나눈 구분일 뿐 행성 차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든 물은 생명의 기원이고 치유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물의 오염은 곧 죽음과 파국을 의미한다. 지금 후쿠시마는 동아시아 지중해의 뜨거운 감자이다. 바다로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하여 희석하겠다는 일본의 발상으로 들끓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승인하면서 머지않아 방류를 강행할 태세다. 행성의 7할이 넘는 바다이니 곧 희석될 수 있다고 설득하려 한다. 또한 과학적으로 방사능을 처리하였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은 갈수록 증폭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에 상응하는 증거가 제시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난 자본주의가 작동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판단으로 바다를 이용하고 나아가서 착취하려는 기도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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