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인감도장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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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대가리에 집 따까리 날아간다.” 원통형의 조그만 나무토막 끝 단면에 글자가 새겨진 도장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듣던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빚보증 서류 등에 도장을 찍었다가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연대책임을 지고 전 재산을 날리는 일이 많았던 시절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말이다. 아무튼 도장은 함부로 찍으면 큰일날 수도 있는 만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경고로 들렸다.

이처럼 도장 한번 잘못 찍었다가 낭패를 당할 수 있는 것은 도장이 바로 자신을 증명하는 징표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도장에는 그 사람의 권위와 권능, 존재가 내포돼 본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수천 년 전부터 도장이 사용된 배경도 도장에 담겨 있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도장은 보통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위가 명확해지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주로 사용하게 된다. 붉은 인주를 묻힌 도장을 종이에 꾹 누른 다음 선명하게 찍혀 나온 자기의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강렬하다. 자기 이름이 강렬한 붉은 색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도 있다. 인주가 붉은 것은 극양의 색깔로 신성한 기운이 있어 삿된 음기의 접근을 막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만큼 도장은 엄정하고 소중한 물건이라는 뜻일 게다.

이쯤 되면 도장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다. 게다가 많은 중요한 문서의 효력이 도장 하나에 달려 있다면 철저한 관리는 필수적이다. 국가 기관에 도장을 등록·관리하는 ‘인감도장’ 제도의 배경이다. 실제로 인감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본인이 직접 읍·면·동사무소에 가야만 가능하다. 일제 때 도입된 제도임에도 지금까지 그 골격은 대체로 그대로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과 다른 증명 수단의 발달은 인감도장의 위상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한 해 5000만 통이던 인감증명서 발급은 작년 말엔 약 3000만 통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급기야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은 기존 인감 증명도 디지털 인감으로 전환하고, 인감이 필요한 사무도 전체 80% 이상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시대 변화에 따른 적절한 조치라고 여겨진다. 일부에선 인감 폐지론도 제기하지만 도장 자체의 존재까지 부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작은 나무토막에 새겨진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한 사람의 풍상이 담겨 있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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