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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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25년부터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대학은 무전공 입학을 확대하고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도록 소득 상위 20%를 뺀 모든 대학생에게 국가장학금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고등학교는 내년부터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데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듣는 고교학점제와 대학 무전공 입학 정책이 말이 되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올해 고3이 되는 자식을 둔 지인을 지난 설 연휴 때 만났더니 “도대체 교육정책은 누가 만드는 건지, 생각은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응급실 의사가 모자라 정작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사망하고, 지방 보건소는 의사를 구할 수 없고, 소아과에선 ‘오픈런’을 해야 한다. 그러니 표면상으로는 의사가 부족한 게 맞다. 그런데 부산 서면이나 해운대 센텀 곳곳에 밀집해 있는 피부과와 성형외과 의원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실천하는 의사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우려 커져

현장 목소리 이해 못 한다는 비판

형식보다 본질적 내용을 살펴야

의대 정원 확대 발표가 나오자 제일 먼저 움직인 곳은 학원가다. 대학생, 재수생, 학부모뿐만 아니라 직장인들로부터도 의대 입학 관련 문의가 쇄도한다고 한다. 지역인재 선발 비율을 확대한다고 하자 발 빠른 서울의 부모들은 벌써부터 지방으로의 이사를 생각한다.

상위권 공대나 과학 쪽 우수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안 그래도 ‘SKY’라 불리는 대학에 등록하고도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 반수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서울대 자연계열 입학생 수보다 많은 2000명의 의대생을 더 뽑는다고 한다. 이공계 인재들의 이탈이 가속화돼 첨단 분야 인력난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대입에서 학과나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입학한 뒤 진로를 정하는 무전공 선발 확대까지 예고하니, 기초학문은 고사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로 몰리는 전공 선택 양극화가 심해질까 걱정이다.

잘하자고 바꾸는 교육정책을 지지하기보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정부가 현장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게 숫자로 표시되는 현실에서 직업 선택은 연봉순이고 대학은 성적순이라는 법칙은 좀체 깨지지 않는다. 의대에 학생이 몰리는 이유는 정년이 없고 연봉이 높기 때문이다.

기초학문의 고사가 우려되는 무전공 선발 확대는 고교 수업과의 연결, 전공·부전공 선택 조건 등 세부지침이 부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에 있는 대학들은 오래전부터 자유전공이나 무전공 선발을 했다. 전공을 선택해서 들어가도 입학만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과목 중 대학 전공과 연결된 과목은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이게 고교학점제와 이어지는 지점이다. 그러니 대학에서 ‘3년 졸업’도 가능하다. 물론 전공을 바꿀 때는 그 전공에 대한 필수 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여러 번 전공을 바꾸면 그만큼 졸업이 늦어진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항상 대학의 코디네이터와 상담하고 전공을 바꾸는 이유, 계획 등을 세세히 짜면 된다. 당연히 관련 인턴십 참여도 바쁘다. 물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는 여전히 많이 선택하지만 어렵고 적성에 안 맞아 도중에 다른 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또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게 있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는 학부 중심의 연구대학에서는 졸업 때까지 수백 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게 한다.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전공을 선택하기 전인 1학년 과정에서 읽어야 할 고전 분량은 어마어마하다. 미국의 이른바 아이비리그에서는 고전, 철학, 심리, 역사 등 인문학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학문을 융합시키려 한다. 스탠퍼드대학교에는 심지어 고전학과가 있다.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하러 들어왔다가 오히려 철학, 역사 쪽으로 전공을 바꾸는 학생도 있다. 인문학 관련 학과 중 한두 명이라도 학생이 있으면 대학원까지 적극 지원한다. 학문은 모든 사람이 다 이을 수는 없다. 학생이 적다고 과를 없앤다는 건 경제적 효용을 따지는 문제지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할 일은 아니다.

건축학과는 오래 전인 2002년부터 미국식 학제를 바탕으로 5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5년제임에도 설계와 디자인에만 집중하다 보니 인문, 철학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시공, 구조, 환경, 재료 등 건축 전반에 대한 교육도 부족하다. 교육의 제도나 형식만 따오지 말고 내용을 보자. 이제껏 우리가 외국에서 가져온 교육정책이 한두 가지였나. 전체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지 않는 이상, 결국은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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