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곧장 힘 발휘하는 최고 여행은 성지 순례 [세상에이런여행] ⑧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여행하는 낱말 (5) 성지 순례>

우리 모두에겐 특별한 의미 갖는 성지 있어
산티아고 순례길·룸비니·메카 등 각기 달라

여행자에겐 가리지 말고 가야 할 공부거리
삶에 영향 미치는 유적, 위인은 셀 수 없어

종교 없는 내게 최고 성지는 프랑스 파리
‘퐁뇌프의 연인들’ 통해 영화 제작 일원 돼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의 카사 바트요. ⓒ박 로드리고 세희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의 카사 바트요. ⓒ박 로드리고 세희

‘성지’란 종교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유적을 말한다. 사람들은 성지를 순례하며 그들 각자의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돌이켜보고 스스로 신앙을 다지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참배하러 가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순례지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인 인도의 ‘룸비니’, 성불한 장소인 ‘부다가야’ 등이 대표적인 성지이고, 이슬람교에선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최고의 성지로 여긴다(이슬람교에서는 이교도의 성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 메카로부터 사방 100km가 성역으로 지정되어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다. 가볼 수 없어서 아주 슬프다).

나는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지만 종교 자체에는 관심이 많아 여러 성지를 여행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캠에 의하면 우리가 ‘신’이라고 믿는 것은 실은 ‘사회’다. 종교는 그 사회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이로움을 좇는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려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 윤리를 계율로써 다스린다. 저마다 섬기는 종교에서 성지를 만들고 순례 여행을 권하는 것은 그만큼 여행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지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 여성이 유럽의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한 여성이 유럽의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사연이 복잡한 성지도 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한 성전을 두고 유대교에서는 솔로몬 왕이 세운 최초의 성전터로 삼아 ‘템플 마운트’라 부르고,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에게 승천한 곳으로 삼아 ‘하람 알 샤리프’라고 부른다. 거룩한 성지에서 두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지내면 참 좋으련만, 종종 방화를 비롯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며 서로를 향해 칼날을 세우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단순히 지구 위의 어느 한 장소를 차지하는 일에 지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종교 대립을 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립해온 역사는 국가 분쟁의 뇌관이자,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갈등과 대치가 얽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대립이 지속되는 세계 분쟁사의 축약판이다. 이처럼 종교란 결국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기에 공부거리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선 여행자에게 성지는 종교를 가리지 말고 가 보아야 할 여행지다.

성지는 넓은 의미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세상의 모든 지점을 뜻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품은 성지가 있다. 죽기 전에 가보기를 꿈꾸는 곳, 이미 가보았어도 다시 가서 보고 느끼고 배우고 싶은 곳. 종교 이외에도 우리네 삶과 가치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유적이나 위인들, 선지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까. 이를테면 건축학도에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한 가우디 건축을 친견하는 것이 성지 순례가 될 것이고, 클래식 음악가에게는 쇼팽의 심장이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이 성지일 것이며, 문학 청년들에게는 헤밍웨이가 머물며 소설을 썼던 스위스 레만호수가 성지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얻고 그것은 곧 감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얻은 긍정 에너지를 조금씩 삶에 녹여가며 지난한 날들을 견디며 크고 작은 것들을 성취해 낼 것이다. 그 성취가 발판이 되어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다시 여행은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다. 여행은 금세 끝나지만 삶은 오래 지속된다. 나는 여행이야말로 소시민이 삶을 감당해 내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 성지 순례만큼 우리 삶에 곧장 힘을 발휘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성지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박 로드리고 세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성지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박 로드리고 세희

종교가 없는 나에게 성지는 프랑스 파리다. 10대 후반에 영화에 이끌렸던 나는 청춘을 영화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만나면서 세상을 향해 눈뜨게 됐고, 영화로 알게 된 세계의 면면을 몸으로 만나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좋아하는 영화는 수십 번 보게 마련인데, 그중 하나가 프랑스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이었다. 파리의 세느강에 놓인 퐁뇌프 다리가 배경이었고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일원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는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기차의 도착’이란 짧은 필름을 상연한 데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파리엔 세계 최고의 영화 관련 시설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있다. 이곳엔 예술영화 상영관은 물론이고 영화 박물관과 도서관을 비롯해 영화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니 파리는 나에게 성지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