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야 할 '콜'이 되레 두려운 여성 대리기사의 삶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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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밤의 유령’ 공개
오는 8일 부산진구서 시사회

다큐 '밤의 유령’ 장면. 카부기공제회 제공 다큐 '밤의 유령’ 장면. 카부기공제회 제공

오늘도 일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노동자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전을 위협받는 순간은 짧은 하루 중에도 여러 번 찾아온다. 바로 여성 대리운전기사의 이야기다. 이들의 인사는 “좋은 콜 받으세요”이다. 이들에게 고객의 성희롱과 폭언은 일상적이다. 온갖 종류의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그들에게 ‘그냥 콜’은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좋은 콜’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듯 덕담을 건넨다.

부산에서 여성 대리운전기사들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카부기상호공제회 측과 출연진은 오는 8일 부산진구 양정동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에서 ‘밤의 유령’ 시사회를 열고 시민과 만난다.

다큐멘터리 ‘밤의 유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밤을 헤쳐 나가는 여성 대리운전기사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대리운전기사의 몸에 부착한 ‘바디캠’ 등을 활용해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밤의 유령’이라는 제목은 스스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대리기사들의 자조 섞인 농담에서 유래했다. 부산·울산·경남지역 대리운전 기사 400여 명 모인 단체 ‘카부기상호공제회’ 소속 여성 대리운전 기사 4명이 이번 작품에 주로 참여했다. 부산이동노동자지원센터 이창우 정책팀장이 카부기상호공제회와 협업해 기획·연출을 맡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취객을 상대해야 하는 대리운전기사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닌 대표적인 직업으로 언급된다. 강도 높은 심야 근무에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이 더해지면서 심혈관 질환으로 돌연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여성 대리운전기사의 경우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차를 거부당하거나 성희롱, 폭언 등에 쉽게 노출돼 안전 위협도 받는 처지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심야 화장실을 찾아 몇 시간을 헤매기도 한다. 위풍당당 여성대리기사모임, 전국대리운전노조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간담회를 열고 “여성대리기사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차를 제한받고, 성희롱에 노출되는 일이 빈번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부울경 지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번 작품에서는 여성 대리운전기사가 심야 대리운전을 하며 느끼는 고충이 그대로 드러난다. 추가 요금 2000원이 아까워 대리운전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던 한 중년 남성은 “이래서 대리하는 것들은 평생 대리만 하는 거야”라며 멸시의 언어를 쏟아낸다. 여성이 남성에게 반박하려 하자 그는 “싸우기 싫으니 그만 말하라”며 잔뜩 힘을 준 목소리로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또 다른 남성은 “일당을 줄 테니 나와 같이 술 한잔하자”며 여성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이렇듯 위협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여성 대리운전기사는 ‘다음번엔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슴속에 품은 채 다음 ‘콜’을 찾아 떠난다. 좌절하기는커녕, 심야에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게 바로 그들이다.

이번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이창우 팀장은 지난해 지급받은 바디캠을 활용해 여성 대리운전기사의 어려움을 알려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큐멘터리 ‘밤의 유령’ 시사회는 ‘국제 여성의 날’인 오는 8일 오후 6시 부산진구 양정동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 5층 혁신홀에서 열린다.

이 팀장은 “지난해 여성의 날을 맞아 노회찬 재단에서 여성 대리기사 20명에게 바디캠을 지급했다. 올해 여성의 날을 기념해 이걸로 다큐멘터리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게 됐다”며 “심야 대리운전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초를 겪고 있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여성 대리기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자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큐 '밤의 유령' 장면. 카부기공제회 제공 다큐 '밤의 유령' 장면. 카부기공제회 제공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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