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여성에게 투자하라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한국의 기록적 저출생 외신도 주목
여성 사회참여 늘었지만 사회 인식 여전
일·육아 병행 힘든 현실에 출산 파업 중

OECD 여성 경제활동·출생률 정비례
노동시장 차별 구조 개선 정책의 결과
미래 위한 골든타임 놓치면 안 돼

돌아보니 매해 가장 처음 쓴 칼럼의 주제는 저출생 문제였다. 2024년에도 어김없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지나고 4월 총선이 다가오는 지금,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저출생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정당에서는 저출생 해법을 주요 공약으로 앞다투어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24년은 ‘트리플’ 인구절벽이 시작되는 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전년 대비 크게 줄어드는 해이기 때문이다. 2014년만 하더라도 40만 명에 육박했던 유치원 입학생은 올해 고작 27만 명에 불과하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처럼 출생률 하락이 지속된다면 50년 뒤에 우리나라 인구는 현재의 절반도 안 되는 2500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요양병원으로 바뀌거나 폐업한 동네 유치원에 양로원이 들어서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린이 보호구역’만큼이나 곧 ‘노인 보호구역’도 많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의 저출생 현상을 주목하는 반응은 더 뜨겁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심각한 저출생 상황을 14세기 유럽에서 번졌던 흑사병에 비유하기도 했다. EBS 다큐멘터리에서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법대 교수는 2022년 기준 0.78명이라는 한국의 합계출산율을 듣고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와!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라고 반응해서 그 반응에 한국의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내 집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주거 문제, 심각하게 치솟은 가계부채 문제, 거기에 너무나도 심각한 사교육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성장주사, 치아교정, 드림렌즈는 학부모들의 3대 ‘등골 브레이커’로 유명하다. 주말까지 빼곡히 들어찬 학원 수업에 과외까지 양육비와 사교육비의 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일과 육아를 온전히 병행하기 어려운 현실이 당장 눈앞에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국 사회는 그간 엉뚱한 방향으로 저출생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거나 해법을 끌고 가기도 했다. 몇 년 전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열린 포럼에서는 고학력 여성이 저출생의 원인이라며 해외 연수나 자격증 취득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2016년에는 정부에서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만들어서 가임기 여성인구 수를 지자체에 구군별로 표시한 적이 있다. 엄청난 비판이 쏟아지고 항의 시위까지 일어났었다.

“이제 한국 여성들은 가정과 일에서 하나만 선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유엔여성기구 성평등센터 주최의 기념행사에서 특별 연사로 나선 진 맥킨지 BBC 서울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2년 전 한국에 와서 저출생 문제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한국 여성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에게 누군가가 “한국 여성들은 출산 파업 중”이라고 이야기해 줬다고 한다. 그는 한국 경제가 지난 50년간 고속 발전하면서 여성을 고등교육과 일터로 밀어 넣고 야망을 키워 줬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은 같은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났지만 사회 인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따른 돌봄과 육아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수록 출생률도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 국가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에 따라 상위 그룹, 중간 그룹, 하위 그룹으로 나눴는데, 상위 그룹 국가일수록 합계출산율이 더 높았다. 흥미로운 것은 1980년대에는 OECD 국가 중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은 국가는 합계출산율이 낮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부터는 합계출산율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정비례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들 국가가 가족 정책과 일·가정 양립 제도를 재편하는 한편, 노동시장 차별 구조를 완화하고 여성의 고용 유지를 위한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회 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이 처한 지금의 상황은 이들 국가의 1980년대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각 정당의 저출생 대책이 노동시장의 차별 구조를 완화하고 여성의 고용 유지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 정책은 이번 3·8 세계 여성의 날 유엔여성기구가 내세운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위해 여성에게 투자하세요.” 여성에게 투자하라. 지금도 골든타임은 지나고 있는 중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