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세계한자학도서관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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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모르는 한자를 대할 때면 새삼 깨닫는 게 있다. 바로 한글의 고마움이다. 예전에 분명히 음과 뜻을 익혔던 글자라도 그것만으로 모두 통하지 않는 게 한자다. 그러면 자전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글은 그렇지 않다. 혹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해도 문맥으로 얼추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한글이 고마운지 모른다.

이처럼 쉬운 한글에 비해 글자 자체를 익히는 데에도 괴로움과 답답함을 피할 수 없는 한자는 구시대의 유물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한자의 매력이 있다.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의 생활과 문화,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추출된 의미가 글자 하나하나마다 응축돼 있다. 글자는 하나인데 담긴 뜻이 많게는 수십 개에 이르는 것도 이런 연유다.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새로운 의미가 계속 생겨나면서 뜻이 풍부해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한자의 이러한 역사성이 일반인의 한자 학습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된 듯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로 인해 후대 사람들이 동아시아의 생활과 문화의 원류를 살펴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렵기는 해도 의미를 파고들면 들수록 지적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바탕이다. ‘글자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산에 이처럼 한자와 관련한 다양한 지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세계한자학도서관’이 13일 경성대에서 문을 연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은 물론 영미권에서 발행된 관련 서적까지 총 1만 권을 갖췄다. 앞으로 1만 권을 더 수집할 예정이라고 하니, 수많은 관련 서적·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한자학의 중심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개관을 기념해 오는 15일까지 ‘한국의 자전과 사전’이라는 주제로 광복 이전·이후 약 40종의 고서적도 전시된다. 한자의 뜻과 발음이 시대에 따라 우리 한글로 어떻게 풀이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자와 한글의 관계는 물론이고 한자 그 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한자 교육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말과 문화에 이미 푹 녹아든 한자를 싫든 좋든 버릴 수는 없다. 이젠 우리 것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보다는 한자에 담긴 통찰과 지혜를 활용하는 게 더 낫다. 세계한자학도서관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해야 할 부분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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