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가 없는 곳에 가능성이 있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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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박정연

거친 블루칼라 노동 현장서
편견 불구 당당하게 일하는
강인한 여성들 속내 털어놔

부산의 화물 노동자 김지나 씨는 ‘추레라’를 몰고 수출입 컨테이너를 나른다. 황지현 포토그래퍼 제공 부산의 화물 노동자 김지나 씨는 ‘추레라’를 몰고 수출입 컨테이너를 나른다. 황지현 포토그래퍼 제공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초 직군 여성 생존기’다. 거친 블루칼라 노동 현장은 남자도 사람대접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을 구경하기조차 힘든 그곳에서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프레시안〉의 여성 기자인 저자가 전국 각지를 발품 팔아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 10인을 만났다. 취재원 발굴부터 인터뷰 섭외까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이 간다. 뜻밖에도 이들은 자신의 노동에 관심을 두고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기자에게 너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 노동자 10명 가운데 2명이나 부산에서 일하고 있다니….

부산의 화물 노동자 김지나 씨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온다. 김 씨는 26.5톤까지 싣는 트레일러인 ‘추레라’를 몰고 수출입 컨테이너를 나른다. 초보는 으레 그렇지만, 여성 초보는 일 구하기가 더 힘들다. 그는 고용 기사로 일할 때 “옷 그렇게 입지 마라”는 선이 넘는 참견까지 들어야 했다. 똑같이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왔는데, 동등한 동료로 대해 주지 않아 힘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차별과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젊은 화물차 기사들로부터 김 씨를 보고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김 씨는 화물연대 부산서부지부 최초의 여성 지부장이 됐다. 그는 당당하게, 그리고 여자답게 살고 싶다고 했다.

정정숙 씨는 기장군의 건설 현장에서 레미콘 기사로 26년째 일하고 있다. 레미콘 차를 안전하게 몰기 위해 지금도 부단히 노력하지만 주변 반응은 늘 싸늘하다. “아이고 가문에 없는 중생이다.” 친오빠의 말이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 가서 먹고사느냐는 투정도 들어야 했다. 조금만 운전 실수를 하면 여자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아이들의 응원과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 씨는 건설 현장에서 여자가 들을 수 있는 호칭은 다 들어봤다고 한다. “남자들이 여자를 부를 때 자기 인격이 드러나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는 잘 새겨야 하겠다. 그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남겼다. 이처럼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은 힘든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편견과 차별에도 맞서야 하는 이중고를 치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성희롱을 지적할 수 있을지, 차별적인 상황 이후에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 블루칼라 여자>에는 새로운 기회도 있었다. 여성 주택 수리 기사가 그 예다. 여성 일인 가구가 급증하지만, 집수리 기술자는 100% 남성이다. 수리 서비스를 요청할 때 누가 우리집에 올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남자 신발을 현관에 갖다 놓고,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전화하는 불편한 상황이 벌어진다. 서울에서 여성 주택수리 기사이자 회사 대표로 일하는 안형선 씨의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다.

안 씨가 여성 주택수리 기사 회사를 만들려고 했을 때 기술자는 국내에 전무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배우게 된 것이다. 그렇게 라이커스라는 회사가 만들어졌다. 라이커스(like us)는 우리와 같은 여성을 위해 만든 서비스라는 뜻이다. 창업한 지 5년이 넘었다니 이제는 꽤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경력직을 구하지 못하고 신입만 뽑고 있다. 모두가 괜찮은 사업아이템이라고 말하면서도 따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라이커스, 지속가능할까(라이커스는 올해 초 부산에서 성공적으로 집수리 기술 교육 워크숍을 열었다).

집을 짓는 ‘빌더 목수’ 이아진 씨가 워크웨어를 입고 작업하는 모습은 근사하다. 일하는 모습을 직접 찍어 구독자 14만을 보유한 유튜버로도 성장했다. 스물세 살 이 씨는 23학번 새내기로 지난해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블루칼러 노동자들에게 “당신은 엄청 멋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막노동이 아니라 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례가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그곳에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박정연 지음/황지현 사진/한겨레출판/232쪽/1만 8000원.


<나, 블루칼라 여자> 표지. <나, 블루칼라 여자>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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