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압축성장은 갈등도 압축한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고도성장 불구 제도적 변화는 뒷전
잠재성장률 파국적 추락 한계 봉착
총선이 압축된 갈등 해결 계기 되길

한국 사람들은 빠른 것에 익숙하다. 느린 것은 못 참는다. 한국 사람들의 원래 성정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고도성장 과정에서 익힌 태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 오랜 기간 동안 아주 서서히 성장해 왔던 것을 돌아보면, 빠른 것에 대한 태도는 최근 몇십 년간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배어버린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 ‘빨리빨리’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하나의 원천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고도성장의 사례로는 우리 앞에 일본이 있었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선 산업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고도성장 경험은 충분히 더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우리는 흔히 압축성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자주 써 왔으면서도 사실 그 의미를 깊이 따져 보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긴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달성하는 것이 압축이다. 그런데 이 압축이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도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실제로 경제에서의 압축성장은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동시에 압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회적인 갈등마저도 압축한다. 산업화로 경제는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우리 의식의 상당 부분은 여전해 과거에 발을 디디고 있다. 그 결과 신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화해하기 어려운 인식의 차이가 생겨버렸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는 젠더 문제도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기업과 정치에서 여성들이 활동할 공간은 여전히 좁다. 더 일반적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준비와 의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해외에서 우리의 저출산 위기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임을 지적하는 논의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그동안 정부가 수백조 원의 돈을 저출산 극복에 쏟아부었다고 하지만,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압축성장으로 경제발전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어야 하는 사회제도적 변화를 동시에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그 대가를 뒤늦게 역시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동안의 성장에 대한 성찰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갈등과 간극의 극복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갈등의 해소와 간극의 극복을 최우선의 국정 과제로 제기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젠더 문제와 같이 섣불리 꺼냈다가는 역풍이 불어 정치적 인기나 득표에 별로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갈등을 수습하기보다는 갈등에 기대어 정치적 자산을 마련하려는 구태도 보인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남녀 간 그리고 세대 간 갈라치기가 바로 그런 나쁜 행태들이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어떤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경쟁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조만간 공약의 윤곽들이 드러날 것이지만, 아마도 항상 그래왔듯이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수많은 개발 공약이 또다시 난무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더 성장하여야 하고 그것도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사고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 시간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면서 압축성장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가르침을 얻는다. 오히려 천천히 갈등을 풀어가면서 지속해서 그리고 오래도록 성장 동력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발전과 사회적 존립을 동시에 보장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그러잖아도 최근 우리 경제는 잠재성장률이 파국적일 정도로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잠재성장률 추락의 깊은 원인도, 말은 크게 안 하고 있지만, 역시 저출산에 있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압축되었던 갈등이 이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빠르게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압축의 역량은 거꾸로 갈등을 빠르게 해소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우리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것을 우리 사회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실행할 수 있는 국민적 동의와 역량을 모으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이번 총선이 그동안 함께 응축되었던 사회적 갈등들을 제대로 돌아보면서, 역으로 압축적으로 풀어가는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