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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피노키오
지난여름 해운대 센텀을 지나다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짐 다인 작품인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소년’이라는 제목이 붙은 공공조형물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 모습인데 얼굴은 약간 험상궂다. 이것을 떠올리게 된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흔한 표현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시기라 지나간 많은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짐 다인은 미국에서 1935년 태어난 팝 아티스트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1958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로 청계천에 소라처럼 생긴 조형물을 설치한 클래스 올든버그(Claes Oldenburg), 백남준과 전위음악으로 활동했던 존 케이지 등 여러 예술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짐 다인은 이들과 당시 미국에서 주류였던 추상표현주의를 탈피하려는 시도로 ‘해프닝’을 발표하면서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부모가 철물점을 운영했던 영향인지 툴박스, 해머, 실내 가운, 신발과 같은 생활 속의 사물을 화면으로 끌어들였고 특히 하트는 그의 대표적인 소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일상 혹은 일반적인 관습이나 관념대로 사물과 사건을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전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이런 그의 방식은 우리에게 친숙했던 사물을 이상하고 낯설게 만들어 오히려 더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하트는 전 세계 공통으로 따뜻한 이미지를 가진 기호이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제작한 수많은 작품에서는 그런 온기는 찾기 어렵다.
동서대 센텀캠퍼스 광장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 피노키오에서도 짐 다인의 이런 독특한 예술 형식을 엿볼 수 있다. 동화 속 피노키오는 비록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지만 대개 어렸을 적 우리는 그 동화에서 기괴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피노키오 얼굴이 귀엽거나 친숙하기보다는 어딘지 어색하고 다가가기 힘든 인상을 받는다. 이 점이 바로 짐 다인의 예술 형식이다.
그러나 그건 짐 다인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우리는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힘차게 팔을 흔들며 발걸음 옮기는 피노키오를 보며 다가오는 새해를 꿈꾸는 것도 우리 권리이다. 앞에 어떤 일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또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할 존재이다. 비록 동화 속 주인공이지만 나에게 희망을 준다면 약간 험상궂은 얼굴로 표현되었어도 상관없다. 푸시킨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을 가진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라는 브래디 미카코의 책이 눈에 든다. 책꽂이에서 몇 년째 그대로인 이 책을 이번 주말에는 읽으려 한다. 또 속는 셈 치고 말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12-2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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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 그림
연말이 다가와 그런지, 일상이 첨단화될수록 정서에 닿는 것을 더 찾는 것 같다. 요즘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대신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카드, 문안 편지가 그리운 시절이다. 눈이 오려는 이 계절, 마음에 닿는 그림으로 허전한 맘 한구석을 달래 보고 싶다.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 긴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스즈키 하루노부(1725?~1770)가 1769년 제작한 우키요에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에서 상업이 번창해 탄생한 신흥 부자인 상인들의 유흥문화로 등장한 미술 산업의 핵심 품목이었다. 책에 실린 삽화인 목판화가 인기를 얻자, 반쪽짜리에서 한 페이지로 그리고 단색에서 다색 판화로 기술이 발전하며 독립된 그림책 출판산업으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 인기가 일본만 아니라 유럽까지 펴져 일본의 대표적 문화수출 산업이 되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우키요에 작품이 유럽과 미국 미술관에 엄청나게 많이 수집된 이유이다.
대부분 스승 이름을 물려받아 활동한 우키요에 작가들과 달리 자신의 본명으로 활동한 스즈키 하루노부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176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5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시기에 제작법이 획기적으로 분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는 이, 목판을 파는 이, 찍는 이, 제작 단계별로 기술자를 모으고, 게다가 자본을 끌어오고 유통과 판매만을 담당하는 기획자까지 두어 우키요에 제작을 체계화했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체계 속에서 스즈키 하루노부는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자 신흥 부자인 상인을 대상으로 최고급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했다. 두세 종 판목에서 열 개 이상 판목으로 늘려 색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고, 여러 번 찍을 수 있도록 질긴 종이도 개발하고, 각 판목에 종이 위치를 정확히 맞출 수 있도록 가늠 표시도 개발한다. 게다가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게 되니까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엠보싱 기법도 개발한다.
‘눈보라 속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연인들’은 하루노부가 개발한 판화 기법이 전부 들어 있는 최고 작품이다. 눈 덮인 나뭇가지 아래 흑백 옷으로 차려입은 연인이 각자 한쪽 손으로 우산대를 잡고 상대방으로 쳐다보는 눈에는 애틋함이 묻어있다.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옷을 차려입은 연인들에게서 절절한 사랑이 드러난다. 바닥에 높이 쌓인 눈을 엠보싱 기법으로 표현하여 이들 사랑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또 이들 배경으로 눈보라가 흩날리는 장면이 그 사랑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게 한다. 부디, 이들의 사랑이 너무 아픈 사랑이 아니었기를….
2025-12-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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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이젠 그리움이 된 눈 오는 시골 정취
한겨울 정취가 그리운 시절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정취는 상상 아니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어스름한 저녁 굵은 눈발이 날려 몇 채밖에 없는 초가집 지붕을 덮고 앞마당에서 촌부가 두엄을 뒤적일 때 강아지 한 마리가 촐랑거리는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림이 있다.
이런 시골 정경을 한국적인 대표적인 이미지로 만든 작가는 유천 김화경이다. 그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이당 김은호의 화실에 들어가 동양화를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했지만, 이내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온다. 해방 이후에는 천안 등지에서 미술 교사로 지내며 이당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60년께 서울에 상경해 2002년 5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도여자사범대(현재 세종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화풍은 서울로 올라온 시기부터 문인화법과 채색화법을 병행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 61년 4·19와 5·16이라는 큰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당시 미술계도 변화를 요구받고 또 변화하려고도 노력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김화경은 이당에게 배운 채색화법과 전통적인 수묵화법을 혼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법을 시도했다. 그의 작품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술 교과서에 실려 한국의 정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양화로 꼽혔다. 하지만 생을 일찍 마치는 바람에 그의 작품에서 창작적 변화를 더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화경의 대표작 중 하나가 동양화치곤 꽤 큰 작품인 ‘천산비설도’이다. 화제가 대부분 없는 그의 작품과 달리 이 작품에는 긴 화제가 쓰여 있는데, 초가 마을이 이루는 정취와 글씨가 만드는 분위기가 제법 어울린다. 제호는 ‘하늘에 흩날리는 눈 그림’ 정도가 될 것이고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옛 문인들이 눈 오는 경치를 그려 속세를 떠난 고고한 마음을 표현하려 했는데 매번 이를 따르고 싶었으나 부족함만 느꼈다. 우연히 옛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촌락을 그리던 중 눈이 몇 척이나 내렸다. 종이를 꺼내 도상을 탐구하다 흥이나 붓을 적셔 촌락에 쌓인 눈을 그렸으나 일시에 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다시 그렸다. 붓 쓰기는 졸렬하여 선인들의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정결한 그 뜻은 마땅히 덜어지지 않는다. 신해년(1971) 시월 상순 유천이 그리고, 청사(안광석)가 제목을 달고 시를 지었다.’
올겨울은 초가집은 몰라도 흩날리는 눈이라도 보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11-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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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올가을 설악 단풍도 예전만큼 이쁠까요.
어떤 산이라도 단풍이 이쁘지 않을 리 없지만, 유독 설악산 단풍에 빠져드는 이들이 많은 것은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설악 산세가 만드는 색채 묘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산을 그린 화가는 많이 있지만 박고석만큼 반평생 동안이나 산을 예찬한 작가는 없다.
1917년생인 그가 2002년 세상을 떠나자, 기사에서는 ‘산과 하나가 된’, ‘산이 된 사람’, ‘산의 화가’ 등등 이구동성으로 산을 그린 작가라고 설명했다. 하긴 살아생전 ‘설악 예찬’을 남겼을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산을 사랑했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박고석은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부터 불량기 가득한 청소년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공부는 뒷전이고 당시 말로는 딴따라 같은 짓만 일삼다가, 그림도 나름 잘 그린다는 자부심에 상처가 생기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평양에 돌아온 길진섭에게 혹독한 핀잔을 들은 것이다. 그 뒤로 마음을 다잡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해방된 뒤 귀국한 그는 곧 월남해 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친구 소개로 훗날 유명한 건축가가 되는 김수근 친누나인 김순자와 10월 결혼하고서 1·4후퇴 때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그린 ‘범일동 풍경’(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 남아 있어 이 시기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손재주를 살려 판잣집과 화실을 만들어 친구들과 제자들이 드나들게 했다. 1955년 정릉에 정착해 대학에 출강하면서도 가족보다 제자들이 먼저였고, 적십자병원에 무연고자로 방치되던 이중섭 장례도 그가 수습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국외 미술 흐름도 그랬지만, 한국 화단은 뜨거운 추상미술이 휩쓸던 시절이었다. 박고석도 1957년부터 60년까지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해 추상미술에 몰두하다 이내 붓을 놓고 만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곤 십여 년 가까이 흐른 1967년 구상전에 참가하면서부터 다시 붓을 들었고, 이때부터 산행을 시작하면서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봉산, 설악산, 유달산 등 유명하다는 전국의 산은 모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산행을 했음에도 박고석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제자 김정의 일화에 의하면 “구리는거 보단 구릴 시간 이쑤문 더 봐야디. 볼 시간도 부족한데 구릴 시간이 업디…”라면서 박고석은 산과 대화하듯 행동했다고 한다. 1990년에는 아예 설악으로 화실을 옮겨 아침저녁으로 울산바위를 보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미 커피와 담배, 불규칙한 식사로 거동이 불편했기에, 1992년 그린 이 작품은 젊은 시절 그렸던 위세 당당한 산은 아니다. 대신 여유롭고 천진한 붓놀림으로 순화된 산 풍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2025-11-12 [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