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잎이 만든 황금빛 터널 함께 걸어 봐요”

  • 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북 영주·봉화 문화유적 답사
부석사, 일주문~천왕문 은행나무길 장관
착시 보정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신기
백두대간수목원, 단풍정원 등 39개 테마 전시
호랑이 6마리 살고 있는 호랑이숲 큰 인기
문수산 축서사, 해발 800m 위치 지혜의 도량
사리보탑 뒤 찬란한 낙조 보며 자비심 소원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단풍은 빨갛게, 은행은 노랗게 물든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벌써 마음이 심란해지려고 한다. 이럴 때는 고민하지 말고 떠나보자. 다닐 행(行), 즐거울 락(樂). 바야흐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락 철이 아닌가. 경상권과 전라권에서는 이달 초중순에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다. 지난달 31일 박물관을찾는사람들(이하 ‘박찾사’)은 경북 영주와 봉화 지역 문화유적 답사를 떠났다. 올해로 24년째를 맞은 ‘박찾사’ 답사는 이번이 954회로 내년에 대망의 1000회 돌파를 앞두고 있다. 방방곡곡 제철 최고의 여행지를 찾아다니는 선수들을 따라나서 봤다.


가을에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보다 은행나무길이 더 인기다. 가을에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보다 은행나무길이 더 인기다.

■배흘림기둥보다 은행나무길

부석사 입구에 도착하니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였다. 한쪽에선 사과 축제, 다른 한쪽에선 ‘부석태 전축제’가 한창이었다.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영주는 서늘한 기후와 큰 일교차가 특징이다. 그 덕분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산지가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옆좌석에 앉은 분이 영주 사과 두 알을 건넸다. 집에 와 맛을 보니 참으로 달고 시원한 게 마트 사과와는 질이 달랐다. 하지만 이곳 영주에서도 기후변화로 고민이 많다니 모두의 걱정이다.

‘부석태 전축제’는 올해 처음 열렸다. 부석태는 영주시 부석면의 토종 콩을 개량해 등록한 명품 콩이다. 백태보다 크고 굵으면서도 청국장을 끓이면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적다고 한다. 축제에서는 부석태전, 콩비지전 등 다양한 전이 총출동했다. 전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의외로 외국인은 잘 모르는 음식이다. ‘콩 한 알이 전(煎)이 되고, 전(煎)이 관광이 되다’라는 이번 축제 슬로건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가운데가 굵고 위아래가 좁아지는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가운데가 굵고 위아래가 좁아지는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하다.

가을의 부석사는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보다 은행나무길이 더 인기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양옆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늘어섰다. 온통 노란 은행잎의 세상, 황금빛 터널이 800m나 이어진다. 은행잎 색깔이 햇빛에 따라 상당히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은행잎은 햇빛이 환하게 비칠 때면 황금빛이 살아나 보석처럼 빛이 났다. 햇빛이 사라지면 짙은 노란색으로 색을 갈아입었다. 이달 중순이 되면 은행잎은 모두 떨어져 두터운 황금 낙엽 카펫으로 변신할 예정이다.


천년 고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천년 고찰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천왕문을 지나 삼층 석탑과 범종각을 만났다. 다시 가파른 석축 계단을 올라 부석사의 정수인 무량수전 마당에 이르렀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인 무량수전은 가운데가 굵고 위아래가 좁아지는 배흘림기둥으로 이름이 났다. 배흘림 양식은 기둥이 위로 갈수록 가늘어 보이는 착시를 보정해 곧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도 비슷한 기법이 사용됐다. 그 시절 동서양의 건축가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비슷한 양식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무량수전 서쪽 암벽에서 전설의 부석(浮石)을 만날 수 있다. 무량수전 서쪽 암벽에서 전설의 부석(浮石)을 만날 수 있다.

무량수전 서쪽 암벽에는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 낭자가 용이 되어 바위를 띄웠다는 전설의 부석(浮石)이 있다. 또 뒤편 호젓한 단풍 숲길을 따라 오르면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국보 조사당도 둘러볼 수 있다. 안양루에는 방랑 시인 김삿갓이 쓴 시 ‘부석사’가 걸려 있다. 한시를 우리말로 대략 옮겨 봤다. ‘평생에 겨를이 없어 명승지를 못 찾다/백발이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오르는구나/천지는 부평초처럼 밤낮으로 떠 있고/드넓은 우주에 이 한 몸은 오리처럼 떠다니네/백 년 인생에 몇 번이나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으랴/세월은 무정하여 나는 어느새 늙은 사내가 되었구나.’

‘무량수(無量壽)’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수명을 뜻한다. 무량수불은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년 고찰 부석사가 헤아릴 수도 없이 긴 수명을 가진 무량수불을 모시고 있다. 삶은 유한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자비는 무한하다는 사실을 부석사에서 깨닫는다.


오전약수는 사이다처럼 톡 쏘면서도 쇠 맛이 느껴진다. 오전약수는 사이다처럼 톡 쏘면서도 쇠 맛이 느껴진다.

■호랑이가 뛰어노는 백두대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가는 길에 봉화 오전약수터에 들렀다. 주변에 식당들이 모여 있어 점심을 먹기 편해서였다. 오전약수는 탄산과 철분이 많아 사이다처럼 톡 쏘면서도 쇠 맛이 느껴진다. 약수터 주변 안내판에는 ‘조선 시대 보부상이 발견했고, 성종 때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 글은 봉화군청 공식 관광 홈페이지에도 그대로 실렸다. 과연 당시에 그런 대회가 있었는지, 그 기록은 어디에 남아 있는지 의문이 든다. 마침, 한 관광객이 일행들에게 “여기는 오전에만 약수가 나오고, 밑에 내려가면 오후약수가 따로 있다”라며 싱거운 소리를 하고 갔다.


백두대간수목원에서 봉자 자생꽃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에서 봉자 자생꽃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봉화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생물자원을 보전하고 한반도 산림생태계의 핵심축인 백두대간을 보호하기 위해 2018년 문을 열었다. 백두대간수목원은 단풍정원, 무지개정원, 알파인하우스(고산식물 보전), 고산습원, 산림습원, 암석원 등 39개의 주제 전시원을 가지고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백두대간수목원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의 최고 자랑거리는 세계 최초 지하 터널형 야생식물 종자 영구 보존 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다. 시드볼트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식물 종자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관련 연구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26년 11월 1일 기준으로 야생식물 6149종, 종자 28만 8267점이 저장돼 있다. 지하 46m, 길이 130m의 터널에서 영하 20도, 상대습도 40%를 항상 유지한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전쟁 및 핵폭발과 같은 지구대재앙으로부터 식물 유전자원을 보존하자는 것이다. 일반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어서 살짝 아쉬웠다.


백두대간수목원에는 축구장 7개 크기의 호랑이 숲이 조성되어 있다. 백두대간수목원에는 축구장 7개 크기의 호랑이 숲이 조성되어 있다.

대신 사람들의 발걸음을 분주하게 만드는 곳이 있다. 축구장 7개 크기의 호랑이 숲이다. 호랑이 숲은 호랑이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자연 지형과 식생을 최대한 입체적이고 실감 나게 조성했다. 현재 호랑이 숲에서 사는 호랑이는 6마리다. 모두 서울대공원과 에버랜드, 대전오월드 등 다른 시설에서 옮겨왔다. 특히 호랑이 숲 막내 미령이는 사람 친화적이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부산 북항에 부캉이가 있었다면, 백두대간 수목원에는 미령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두대간수목원의 최고 인기 스타는 호랑이 숲 막내 미령이다. 백두대간수목원의 최고 인기 스타는 호랑이 숲 막내 미령이다.

관람객들은 안전한 유리나 철망 시설 밖에서 호랑이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수목원의 모든 관심이 호랑이에 집중되어 다소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든다. 산림청이 나서서 호랑이의 종 보전과 연구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시아 최대 수목원의 가을은 너무도 아름답다.


■문수산 축서사에서 자비를 소원

‘박찾사’ 답사단을 태운 버스는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해발 800m까지 힘들게 올라갔다. 마지막 코스인 문수산 축서사에 가는 길이었다.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심상찮다 싶었다. 문수보살은 불교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이 문수보살이 봉화의 산에 모습을 드러내며 문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축서사(鷲棲寺)는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이다. 문수보살과 독수리 모두 날카로운 지혜를 상징하고 있었다.


축서사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명상 수행 중이다. 축서사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명상 수행 중이다.

축서사는 예부터 수행하기 좋은 도량으로 알려졌다. 고려 시대 축서사에는 200여 명의 대중들이 수행하느라 공양지을 때면 쌀뜨물이 십리 개울물을 물들였다고 한다. 축서사 템플스테이는 이 역사를 계승했다. 상시운영하는 마음쉬기부터 토요철야정진, 2박3일부터 7박8일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뤄져 있다. 마침 아미타삼존불 앞에서 명상 중인 분들을 만났다. 그 뒤로는 빨갛게 물이 든 문수산의 모습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축서사 낙조는 봉화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축서사 낙조는 봉화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축서사 낙조는 봉화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축서사 사리보탑 뒤로 찬란했던 가을 해가 떨어지는 모습이 과연 장관이다. 축서사에서 수행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자비가 널리 퍼져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소원해 본다. 그렇게 10월을 보내고 11월을 맞이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