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박물관의 비밀 창고가 열리다, 런던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
아트컨시어지 대표
박물관에 전시되는 작품은 전체 소장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머지 수많은 문화유산은 수장고라는 이름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보관된다. 일반 관람객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 곳이 있다. 영국 런던 동부에 새롭게 등장한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V&A East Storehouse)다.
2025년 5월 개관한 이곳은 세계적인 장식미술·디자인 박물관인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의 새로운 실험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미디어센터로 사용된 건물의 일부를 개조한 공간이다.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에 자리한 연면적 1만 6000㎡, 4개 층 규모의 거대한 공간에는 소장품 25만여 점, 도서 35만 권, 아카이브 1000여 건이 보관되어 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뉴욕의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 + Renfro)다. 뉴욕 하이라인과 더 셰드(The Shed)로 유명한 이들은 이번에도 건축의 관습을 뒤집었다. 화려한 외관 대신 수장고 내부를 건축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높이 솟은 중앙 수장 공간이 펼쳐진다. 철제 선반과 보관함이 여러 층에 걸쳐 이어지고, 그 사이로 관람객이 오간다. 마치 거대한 문화유산의 미로를 탐험하는 기분이다. 일반적인 박물관이 작품을 선별해 정돈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이곳은 수집과 보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소장품의 면면도 놀랍다. 미국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카우프만 사무실의 실내 공간, 15세기 스페인 토리호스 궁전의 화려한 목조 천장, 철거된 런던 로빈 후드 가든스 공동주택의 건축 일부가 눈앞에 나타난다. 패션과 가구, 도자기와 공연예술 자료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든다. 피카소가 제작한 발레 뤼스의 대형 무대막도 만날 수 있다.
가장 혁신적인 시도는 '오더 언 오브젝트(Order an Object)' 서비스다. 관람객이 원하는 소장품을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전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이 선택한 작품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던 관람객이 스스로 탐구할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다. 보존과 연구라는 박물관의 숨겨진 기능까지 대중에게 개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곳이 위치한 이스트뱅크(East Bank)는 런던 동부의 새로운 문화지구다. 올림픽 이후 산업시설과 기반시설을 문화·교육 공간으로 재편하는 도시재생의 중심에 V&A가 자리 잡았다. 문화시설이 도시의 미래를 바꾸는 또 하나의 사례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박물관은 아름다운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의 기억을 시민과 함께 나누는 열린 지식의 창고가 되어야 하는가. 이곳에서는 수장고 자체가 전시가 되고, 보존 과정이 문화적 경험이 된다. 감춰진 소장품을 시민의 자산으로 되돌려주는 것, 이것이 런던의 새로운 수장고가 보여주는 미래 박물관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