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12) 한말 전·후기 관동의병장 성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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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터지자 관직 그만두고 투쟁

"1908년 5월 16일, 영천수비대에서 하사 이하 통역을 합쳐 모두 7명, 경찰서에서 순사부장 이하 6명이 정찰을 강행하기 위해 출장하였는데, 봉화군 신양면(현 춘양면) 서벽리에서 의병의 중첩된 포위망에 빠져 영천경찰서 배속 순사, 봉화주재소 배속 순사, 영천수비대의 오장 외에 한인 순사, 통역 등이 전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돼 다른 곳으로 간신히 험로를 더듬어 도망해 귀대하였다."

영천경찰서 소속 순사부장의 기록인데, 연합작전에 나섰던 인근 지역 경찰서 기록도 어금버금하다. 그 며칠 전인 5월 7일 봉화군 재산면에서 있었던 재산전투에서 4천여 의병에게 참패를 당했던 일본군은 상당수의 의병들이 귀가한 틈을 이용, 봉화 인근 지역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총동원하여 의병토벌에 나섰다가 낭패를 본 것. 당시 의병토벌에 나섰던 일본 군경의 비밀기록을 보면, 그들이 의병과 싸워서 전사한 경우가 흔치 않고, 의병들에게 쫓겨서 도망쳤다는 구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적 수백 명을 사로잡은'('운강창의일록'의 기록) 이 서벽전투에서 맹활약을 벌였던 의병장이 성익현, 이강년 등이었다.

성익현 의병장은 강원도 춘천 출신. 춘천진어영의 초관(哨官)으로 벼슬길로 나아가 무관으로 재직 중, 을미왜란(을미사변)이 터지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참여, 실질적인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춘천의진이 해산되자 민용호의 관동의진에서 선봉장을 맡았고, 강원 삼척, 경북 울진, 평해, 봉화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그 해 가을 의진을 해산했다.

10여 년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관동의병을 일으켜서 삼척, 울진, 봉화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강원 지역의 의병을 이끌던 그는 경북에서 대규모 의병을 이끌던 이강년 의진과 연합했다. 1908년 5월 초에는 4천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연합의진이 형성되자 이들은 경북 봉화군 내성을 점령해 일본 군경에 대항할 튼튼한 진지를 구축코자했다. 당시의 의병투쟁은 일제 비밀문서에 세세히 나타나 있다.

"5월 17일 오전 4시20분, 고갯마루에서 동쪽으로 약 2천500m를 내려왔을 때, 약 400m 동쪽 좌전방에서 백·흑의의 의병 40~50명이 우리 일행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래서 왼쪽으로 전개해 응전했는데, 의병들이 점차 북쪽 고지에 나타나더니 잠깐 사이에 갑자기 일행을 포위했다. 그곳에서 완전히 포위당한다면 위험치고는 가장 심한 것으로 천천히 사격하면서 철수하기로 하고 의병의 전력을 확인한 즉, 의병의 실제 수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우세함은 종전에 보지 못한 바이고, 또 무기도 총이 많은 것을 보았다."

연합의진의 규모가 과장된 것이라고 믿고 정찰 및 토벌에 나섰던 일본 군경이 복병을 만나 후퇴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내성리)에 의병이 무려 1천500명이 나타나 교전했으나 병사의 수가 적고, 탄약이 결핍하였으므로 일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아침부터 의병들에 의해 봉화군 내성면 순사주재소와 그곳 헌병분견소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지만, 응원군을 파견할 여유가 없고 연락을 취할 길이 없어 상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의병 세력이 매우 창궐하고 있다." 5월 18일 내성전투를 기록한 또 다른 일제 비밀문서엔 일본 군경의 당혹감과 긴박감이 묻어난다.

1908년 5월에 있었던 봉화지역 의병투쟁은 5월 7일 재산전투, 16~17일 서벽전투, 18일 내성전투였다. 이들 전투는 성익현 의진의 4개 부대와 이강년 의진의 3개 부대 2천여 의병이 일본군 제47연대장 나마타메 신(生田目 新) 대좌가 지휘하는 봉화·상주·안동·영천·예천 등지의 일본 군경 합동토벌대와 싸웠던 대규모 전투였다. 이들 전투는 한말 후기 의병투쟁에서 가장 큰 규모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 일본 군경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한말 의병사에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성익현 의병장은 한말 전·후기 의병장으로서 경술국치 후에도 태백산과 일원산 등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유격전을 계속하다가 종적을 감추었지만, 그를 추모하는 '춘천의병아리랑'은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있거라. / 신연강 배터가 하직일세.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구나. /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우리나 부모가 날 기르실 제 / 성 대장 주려고 날 기르셨나.


귀약동 납날개 양총을 메고 / 벌업산 대전에 승전을 했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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