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옥의 시네마 패션 스토리] 49. 역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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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 용 수놓인 백룡포 '정조의 분노' 표출

화가 난 표정의 용이 수놓인 정조(현빈 분)의 백룡포 흉배. 진경옥 제공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콘텐츠는 바라보는 이에 따라 평이 엇갈린다. 영화 '역린'에 대한 평이 특히 그렇다. '역린'은 정조 즉위 1년, 왕이 거처하는 존현각에 자객이 침투한 '정유역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정조의 비극적인 삶과 왕의 암살이라는 거대한 음모 과정을 담았다.

영화는 조선의 22대 왕 정조(현빈 분)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상중을 배경으로 한다. 이 때문에 정조는 붉은 곤룡포 대신 백룡포를 입고 있다. 채도가 낮은 푸른빛의 의상과 왕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소박한 서고, 존현각. 이 같은 심미적인 배경은 영화 '역린'이 담고자 하는 정조의 심중을 슬며시 들여다보게 한다.

이야기에 못지않게 의상이 주목 받은 '역린'의 첫 관람 포인트는 출연진의 옷 색감이다. '역린'의 의상은 또 다른 영화 '혈의 누' '음란서생' '방자전'을 통해 대종상 의상상을 3차례나 수상한 정경희가 만들었다. 그의 별명은 '한복 아줌마'. 그는 그만큼 사극에서 의상을 많이 지었고 상도 받았다. 의상을 포함한 영화의 전체 색감은 어둡고 가라앉은 회색 톤.

정 의상감독은 정조를 비롯한 모든 인물의 옷을 흑백으로 대비시켰다. 정조는 흰색, 왕의 그림자와 같은 홍국영과 상책의 옷은 검은색과 톤 다운된 보라색, 정조와 대립한 노론 세력과 살수는 검정 옷을 입었다. 그런데 잿빛의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강렬한 색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궁 최고의 야심가로 정조를 위협하는 정순왕후(한지민 분)다.

그의 주된 색깔은 '강렬한 레드'다. 정조의 할머니이지만 정조보다 7살밖에 많지 않은 그는 상복조차 팜파탈을 강조했다. 흰 모시 상복 밑으로 슬쩍 드러난 속치마는 압권으로, 역시 빨간색이다. 이와 달리 남편 사도세자를 잃고 아들을 지키려는 혜경궁 홍씨(김성령 분)의 의상은 수수한 블루 톤으로 설정됐다.

정조는 두 종류의 옷을 주로 입었다. 집무를 볼 때에는 흰 곤룡포, 아버지(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사당에 갈 때는 삼베옷을 입었다. 그의 백룡포는 제작 기간만 2개월 이상 걸렸다고 한다.

영화에서 백룡포가 주인공처럼 화면에 비치는 장면이 있다. 공중에 근엄하게 걸린 백룡포 아래 세답방(왕의 옷을 빨고 다리고 박음질하는 곳) 나인들이 바짝 엎드려 있는 이 장면은 '역린'의 스토리텔링을 가장 잘 조명한 장면으로 꼽고 싶다. 높게 들린 백룡포는 정유역변이라는 위기를 맞은 정조의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한 설정이다.

역린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뜻한다. 그만큼 지극한 분노를 일컫는다. 역린의 비밀은 백룡포의 흉배에 숨겨 놓았다. 곤룡포의 용은 편안한 표정이지만 정조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민화에서 찾아낸 화난 용을 수놓았다고 한다.

한복은 외국인 인식 조사에서 김치에 이어 국가 이미지 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역린'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한복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 더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kojin1231@naver.com


진경옥

동명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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