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2. 의령 탐진 안씨 종택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安씨네 사람들, 예서 다 살았네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의 탐진 안씨 종택 사랑채 전경. 이 집의 특징은 건물 간 간격이 넓고 탁 트여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은 탐진 안씨(耽津 安氏)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는 족히 수백 년은 된 듯한 당산나무(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앞에 '입산마을을 빛낸 인물들'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다. 안기종, 안효제, 안희제, 안창제, 안준상, 안호상, 안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면면의 이름만 봐도 마을 내력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탐진 안씨가 입산마을로 들어온 것은 1600년대 초. 순흥 안씨 탐진군파 헌납공 안기종(1556~1633)이 입향조다. 안기종의 본관은 탐진, 자는 응회,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책 읽는 것보다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했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를 겸비한 재목으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영천·화왕산성 등지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1906년 지어진 종갓집 주변으로
안씨 일족의 여러 고택들 즐비
안준상·호상·희제 생가도 포함
닮은 듯 다른 고택 '투어' 재미 쏠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생가의 안채 옆면.
■집안 곳곳에 세심한 손길

오늘 찾아가는 고택은 입산마을 탐진 안씨 종택(경남문화재자료 제437호)이다. 지금까지 15대에 걸쳐 세거하며 10대 연속 천석지기 재산을 유지했던 대종가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 두고 한적한 시골길로 걸어간다. 길을 중심으로 왼쪽엔 장백산 기슭을 따라 자리 잡은 40여 가구의 집이, 오른쪽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엔 모내기를 끝낸 논에 모들이 정연하게 한들거리고, 밭에서는 양파 수확이 한창이다. 마을 앞을 지나는 찻길 건너엔 넓은 유곡천이 유유히 흘러간다. 풍수의 문외한이 봐도 이곳이 길지임을 알겠다.

5분쯤 가다 보면 '탐진안문 헌납공파 대종가 입구'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들면 고샅 끝에 탐진 안씨 종택(입산로2길 15-5)의 솟을대문이 보인다.

종택은 이 집 종손인 안호종(61) 씨의 고조부 안영제가 1906년 건립한 근대식 가옥이다. 넓은 대지에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곳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트인 '口'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안채 오른쪽에 사당이 있고, 골목과 사랑마당 경계에 대문간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사랑채와 안채로 향하는 동글동글한 박석이 정겹게 놓여 있다. 마당 오른쪽 텃밭엔 갖가지 채소가 자라고 있고, 왼쪽엔 키 큰 고목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다. 사랑채 앞엔 돌과 통나무로 경계 지워진 화단에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다. 주인의 세심한 손길이 구석구석에 스며 있음을 단박에 알겠다.
탐진 안씨 종택 사랑채에는 특이하게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좌·우측 툇간과 어칸에 방을 두고, 어칸방 좌우에는 대청마루를 배치했다. 고택 취재에서 우진각지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오래 쳐다본다. 우진각지붕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혼합한 양식으로, 단정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는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건립한 것이다.

사랑채를 지나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보인다. 안채는 정면 7.5칸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오른쪽부터 부엌 2.5칸, 안방 2칸, 대청 2칸, 작은방 1칸 순으로 배치돼 있으며 전후퇴가 설치돼 있다. 부엌 뒤쪽에는 작은 찬방이 있고 작은방 앞 툇마루 앞쪽에는 평난간을 설치했으며, 툇마루 아래에 함실아궁이가 있다.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처마도리와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안채는 전통적인 건축 형식과 근대의 합리성, 효율성이 조화된 건물이며 일제강점기 이전에 경남지방에 있었던 부농 주택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1.5칸이며 일제강점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집의 특징은 매우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사랑채 대청에 앉아서도 안채의 거동을 살필 수 있고, 안채로 가는 길이 매우 넓고 트여 있다. 건물 간 간격도 널찍하다.
탐진 안씨 종가의 종손 안호종 씨.
종손 안호종 씨는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종택으로 달려가 집을 가꾸고 돌본다. 종가 종손의 어깨는 늘 무거운 법이다.

■고택 전시장

입산마을에는 탐진 안씨 종택 외에 고택들이 즐비하다. 모두 대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안 씨 일족의 집들이다.
신식학교인 창남학교가 들어섰던 상로재.
종택 입구에는 '안범준 고택'(경남 문화재자료 제440호)이 있다. 안범준 씨는 안호종 씨의 5촌 당숙이다. 대지 내에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가 주축 선상에서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가운데 두고 전후 3열의 석 삼(三)자형으로 배치됐으며, 안마당 우측에 곳간채가 모로 자리하고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경리시설을 집약 배치한 근대기 남부지방 부농주택의 일반적인 배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현존 건물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연혁이 분명한 것은 사랑채뿐. 사랑마루의 충량과 망와에 새긴 명문으로 보아 1914년에 기와를 굽고 1916년에 상량한 것으로 보인다.

종택 왼쪽 담을 사이에 두고 '안준상 고택'(경남문화재자료 제438호)이 있다. 안준상(1898~1994)은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로 유명하다. 이 집은 1903년에 건립됐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안채 1동뿐이다. 안채는 앞면 5.5칸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왼쪽부터 작은방 1칸, 대청 2칸, 안방 1칸, 부엌 1.5칸이 배치돼 있고 전후퇴를 갖추고 있다. 기단이 높고, 건넌방 앞의 툇마루 앞에는 평난간을 둘렀으며 건넌방에 불을 때던 함실아궁이가 있다.

종택 인근에는 '안호상 생가'(경남 문화재자료 제439호)도 있다. 안호상(1902~1999)은 민족사학자이자 대종교 지도자이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겸 곡간채, 평대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탐진 안씨 문중의 책 125종, 간찰 1316종, 고서 119종은 부산대 도서관 '설뫼문고'에 별도 보관돼 있다.

■백산 안희제를 낳은 집

종택에서 100여m 떨어진 백산 안희제 생가(경남문화재자료 제193호)로 발길을 옮긴다. 백산은 독립운동 자금원 역할을 한 백산상회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고 교육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사의 걸출한 인물이다. 안채와 사랑채·부속사 등 2동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농가 주택이다.
입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수백 년 된 당산나무.
안채는 정면 6칸 팔작지붕으로 앞뒤 툇간이 발달해, 길어진 측면의 길이와 조화를 이룬다. 실내는 왼쪽부터 마루, 방, 대청, 방, 부엌 순으로 배치돼 있다. 전후 툇간의 발달로 겹집 형식으로 발전해 기능이 다양한 방이 필요하지만, 별동(別棟)을 만들지 않고 한 건물 안에서 처리한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인다. '백산고가' 현판은 진주에서 활동했던 은초 정명수 선생의 글씨다. 사랑채는 안채와 바짝 붙어 있는데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했다. 정면 4칸에 전후 툇간이 발달한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 면에 마루를 뒀다. 백산 생가는 지난달부터 내년 1월까지 사랑채 지붕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라 어수선했다.

입산마을을 나오면서 집과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고택 취재를 다니다 보면 사람보다 집에 더 큰 매력을 발견하곤 하는데, 입산마을에선 사람의 덕망에 눌려 집이 외려 왜소하게 느껴졌다. 탐진 안씨 종택을 중심으로 입산마을 전체가 음으로 양으로 독립·개화운동에 관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