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풍경] 현대 소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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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이청준

우리 학과에 지원해 입학하는 학생들을 만나 물어보면 대개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글 쓰는 것이 좋았노라고 대답한다. 나도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책 읽고 있는 내 모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 하루에 대한 기억은 참 생생하다. 중 3때였다. 어느 날 아침 등교하려는데 누님 책상 위에 문고판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또 성숙한 척하고 싶은 같잖음이 발동했으리라. 그 책을 가방에 찔러 넣고 학교에 갔다. 쉬는 시간 책상 밑으로 펼치고 문고판의 작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데, 뭔가 쿵!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것 같았다. 점심시간 때 친구들이 모두 담임 선생님의 명에 따라 자습을 하고 있을 때도 난 읽던 소설에 빠져 있었다.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불이 난 것 같았다. 담임 선생님이 공부를 안 하고 딴짓하는 나를 본 것이었다.

그날 그 소설집이었을 것이다. 내가 진지하게 소설을 생각하고 문학이란 것과 내 삶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시작한 날과 계기는. 몇 년이 지난 후 고등학교 때 문학에 내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그래야 내 삶이 가치 있어 질 것이라고 작심했을 때 난 그 문고판을 다시 꺼내 보았다. 그때서야 난 그 소설집의 제목과 작가를 알 수 있었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였다.

대표작 <병신과 머저리>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의사인 형과 그림이 제대로 안 그려져 고민하는 동생의 대비를 통해 1960년대 청년 세대의 아픔과 고민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동생은 형이 쓰고 있는 소설을 훔쳐보고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실은 동생의 고민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동생은 말한다. '형은 6·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라고. 우리 사는 현실이 어디 선명한 답을 주는 세상인가. 고민이 있다고, 너도 있지 않느냐고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현대 소설'의 뿌리이자 열매이다. 그것이 작은 문고판 속의 소설이 나에게 일러준, 문학의 힘이자 현대 소설의 가치였다.

이호규

동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동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저항과 자유의 서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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