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퇴계 이황과 포스트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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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요즘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읽고 있다. 이황이라면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니 ‘이발기승설(理發氣乘說)’을 논한 심오한 철학자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그는 단연 정치가였다. 유교는 애초부터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사상이다.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였던 터다. 만약 그가 환란을 피해 안동으로 도피하여 철학책이나 쓴 사람이라면, 그는 유자가 아니다.

그는 ‘사화의 시대’를 살았다. 태어나기 2년 전 무오사화로부터 45세의 을사사화에 이르기까지 선비들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정쟁의 시대가 그의 생애와 겹친다. 사화의 끝에서 그는 새로운 삶을 결단한다.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참혹한 살육이 계속되리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이 결단이 퇴계라는 이름 속에 들어있다.

안동에 은거하며 <성학십도> 집필
서울 바깥에서 ‘국가 혁신’ 고민
그 바탕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
오늘날 학교·지방의 방향성 자극

퇴계는 ‘계곡(溪)으로 물러난다(退)’는 뜻이다. 서울은 산꼭대기요 지방은 산골짜기다. 서울로 벼슬하러 가는 길은 진취요 지방으로 물러나는 것은 퇴행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정쟁을 피해 학문의 세계로 숨었다고 오해되었다. 그러나 계곡은 몰락이 아니라 근본 자리다. 물러남은 도피가 아니라 본질을 검토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긴 방랑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우선 내가 일찍이 내려갔던 곳보다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이건 니체의 말이긴 하나 퇴계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황은 정쟁을 피해 계곡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다. 까닭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처방전을 제시할 참으로 물러나는 길을 개척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열 개의 그림과 각각 간단한 해설로 이뤄진 팸플릿이다. 이 속에 그가 산골짜기에서 획득한 정치철학이 온축되어 있다. 인간의 우주적 본원을 논한 ‘태극도’로부터 마음의 중요성을 따진 ‘심통성정도’,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을 도해한 ‘인설도’ 등이 잘 알려진 것들이다. 유의할 것은 이것이 어린 임금, 선조에게 헌정한 책자라는 점이다. <성학십도>는 50년간 피로 칠갑한 정쟁의 시대를 치유하고 국가의 건강을 도모한 혁신 프로그램이다.

그중 세 개가 학교에 대한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소학도’ ‘대학도’ 그리고 ‘서원도’(원명은 ‘백록동규도’)가 그것이다. 유교 사상의 핵심은 배움이요, 유교 국가는 학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이것은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 압축돼 있다. 당시 문제는 학교의 변질과 배움의 타락에서 비롯했다고 이황은 판단한 것이다. 이에 소학교를 고작 글이나 암기하는 곳이 아니라 제 몸을 수련하는 마당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을 ‘소학도’에 담았다. 또 고시 공부 장소로 타락한 대학을 주체적인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비전을 ‘대학도’에 담았다. (퇴계는 사화의 원인이 대학, 즉 성균관의 타락 때문이라고 믿었다.)

핵심은 서원도에 있다. 새 문명의 꿈이 여기 담겨 있다. 서원은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를 기르는 곳이 아니다. 그런 기능은 소학과 대학으로 충분하다. 서원은 국가와 정치의 의미, 인간과 사회의 근원을 질문하고 성찰하는 인문학교다. 즉 서원은 국가의 바깥에 위치한다. 퇴계는 권력으로부터 거리 두기와 학문의 자유, 자율과 자치를 내내 강조했다. 서원들 대부분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자리한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 퇴계’는 성공했는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증거가 <성학십도>요, 또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그림이다. 지방에서 퇴계의 인망이 높아지자 서울의 군주는 그의 권위를 활용하고 싶었다. 정치는 폭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권위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는 한사코 출사를 거부하였다. 이에 명종은 화공을 보내 퇴계의 학교를 그리게 하여 침소에 걸어 놓았다. 그것이 1000원권 뒷면의 그림(모사도이긴 하지만)이다. 이건 퇴계의 정치적 성공을 보여준다. 산꼭대기가 흠모하는 산골짜기의 힘.

또 하나가 <성학십도>다. 이것은 계곡으로 내려와 거기서 심오를 체득하고 실천한 퇴계가 산정에 올라 제시한 새 정치 프로그램이다. 움푹 팬 V자 계곡을 퇴계는 내려왔다가 다시 오른 것이다. 그 후 사화가 종식되고 사림파의 시대가 열렸던 것도 그의 정치적 성공을 보증한다. (외려 사림파 내부가 분열된다. 율곡 시대의 동서분당이 그것이다.)

어제부터 코로나 사태로 연기되었던 학교들이 개학했다. 두어 달 동안 우리는 계곡 속에서 살았다. 골짜기로 내려오기 전의 땅과 다시 오른 땅이 같아서는 안 된다. 포스트 코로나는 전혀 다른 세계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교육을 꿈꾸고 새로운 학교를 설계해야 한다. 퇴계의 이력은 새로운 정치의 방향과 교육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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