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지역’에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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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지방(중앙에 대칭되는 표현을 강조하고자 ‘지역’이란 용어 대신 사용함)에서 나고 지방에서 자랐다. 지방에서 직장을 잡고, 지방에서 결혼해 아이 낳고 남부러울 것 없이 잘살고 있다. 한데, 아주 가끔은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갑자기 ‘2등 국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국민에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어서다.

언어 습관은 더 무섭다. 방학을 맞아 본가에 온 딸아이에게 “너, 이번에 서울 가면 다음엔 언제 부산 오니?” 하고 물었다. 그러자 딸아이는 “개강 직전에 다시 내려올 거예요!”라고 말한다. 친구가 딸아이 안부를 묻는다. “큰딸, 서울 올라갔어?” 그렇다. 서울은 부산에서 보면 ‘올라’가는 것이고, 부산은 ‘내려’오는 것이다. 서울 사는 친구나 선배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 백번 양보해서 지역 비하의 뜻이 없다고 해도 은연중에 써 온 말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수도권·지역 격차 갈수록 벌어져
은연중에 쓰는 말과 행동도 영향
지역에 산다고 차별받지 않아야

문재인 정부 균형발전 정책 후퇴
수도권 집중 바꾸지 않으면 안 돼
인구 분산·지방분권 함께 추진을



지역 차별 혹은 격차와 연관된 에피소드는 숱하다.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가덕신공항을 다뤄야 한다고 지역에선 십수 년째 떠들지만 수도권 사람들에겐 ‘소귀에 경 읽기’다. 그들은 경제성도 안전성도 모두 ‘낙제점’인 김해신공항 확장 타령만 할 뿐이다. 이럴 땐 중앙정부도 ‘중앙’언론도 모두 한통속인 듯하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따라 2017년 말 부산으로 옮겨온 동삼혁신지구의 A 기관 소속 책임연구원을 만났다. 그는 부산 이전 후에 놀라운 일이 생기고 있다면서 말을 꺼냈다. 해마다 여름이면 A 기관에선 산학연계 차원에서 현장실습 대학생을 선발하는데, 올해는 부·울·경의 여러 대학 실습생이 70%에 달했다는 것이다. 기관이 수도권에 있을 땐 잘해야 지역 거점 국립대생 한두 명이 포함되면 다행이고 대부분 ‘인 서울 대학’ 차지였단다. 외부 전문기관 실습 단계부터 지역 대학생들이 불리했으니 정규 취업에선 오죽했겠나 싶다. 지역인재 의무채용제가 아니더라도 공공기관 이전이 지역 학생들에겐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게 분명하다.

최근 주요 쟁점이 되는 ‘행정수도 완성’과 ‘제2차 공공기관 이전’ 문제를 다루고자 이야기를 꺼냈는데, 자꾸만 옆으로 샌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디든지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솔직히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행정수도 이전’ 화두를 던질 때만 해도 ‘뜬금없다’ 싶었다. 16년 동안 잠자던 어젠다였다. 그런데 불과 10여 일 만에 민주당이 행정수도완성추진단을 구성하고,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로 구성된 ‘국정과제협의회’와 간담회를 여는 등 속도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이번엔 뭔가 되는가 싶어 기대가 커진다. 설령 일부의 주장처럼 이것이 ‘부동산 정국’ 탈피용이나 대선 전략이라고 할지라도 ‘지방’에 사는 국민으로선 너무나 반가운 의제임이 틀림없다.

오히려 ‘고르게 잘사는 나라’를 기치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 임기 후반에 이르도록 나오지 않았다는 게 역설적이다. 수도권 집중 기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출구가 없다. 국토 전체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이 인구수는 절반을 넘어섰다. 대기업의 8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렸고, 국내 대학 75%는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 쏠림 현상이 어제오늘은 아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의도적인 인구 분산 못지않게 지방분권이 이뤄져야 한다.

‘소득을 결정하는 일자리의 새로운 지형’이라는 부제를 단 <직업의 지리학>이란 책이 있다. 이 책 저자인 엔리코 모레티에 따르면 어떤 도시들은 좋은 일자리, 재능 있는 인력, 투자의 집중이 심화하는 현상을 경험하는 반면, 다른 도시들은 급속히 쇠퇴한다. 문제는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소득 격차뿐 아니라 교육, 기대수명, 가계 건전성, 심지어 정치적 영향력 등 사회 전반을 엄청난 방식으로 개조하는 추세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 불균형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찾지 않으면 더 큰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2004년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 결정으로 현재의 불완전한 반쪽 행정도시가 만들어졌지만, 시대가 달라졌고 국민 여론도 나쁘지 않다. 다만 현 정부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그러긴 위해선 행정수도 이전뿐 아니라 공공기관 추가 지방 이전 대상을 대폭 확대하고, 최대한 빨리 추진해야 한다. 이 둘은 수도권 집중 완화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결코 분리 대응할 문제가 아니다. ‘지역’에 살아서 수도권 사람들이 부러워할 그날이 오긴 올 것인가.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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