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슬기로운 청원권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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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비교공법학회장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을 지향·반영하고자 2017년 8월 정권 출범 100일을 맞아 청와대 홈페이지를 ‘국민 소통 플랫폼’으로 개편하면서 신설한 국민 소통 공간이다. 출범 이후 올해 7월 말까지 총 87만 8690건이 접수되었고, 이 가운데 청와대의 답변 기준인 ‘20만 이상 동의’를 받은 청원은 189건, 답변이 완료된 것은 178건이다. 그런데 답변이 완료된 경우에도 국회에 입법추진 중이거나 추진을 의뢰한 경우를 제외하면 청와대 자체의 권한으로 해결한 건수는 일부에 불과하다. 특히나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이거나 입법부나 사법부 관련 내용은 정부가 처리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였다.

청와대는 이 게시판에 대해 국민 의견 표출 공간이며 대의제를 보완할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공간으로 평가해 왔다. 분명히 우리 사회에서 주목해야 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를 드러내 보여준 기능을 했다. 하지만 제도의 디자인이나 운영과 관련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첫째, 청원 대상에 대한 제한이 없어서 입법부·사법부·지방자치단체의 권한·업무 등과의 충돌 가능성이 작지 않아 권력분립 원칙 위배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 둘째, 국민의 의사가 정제되지 않은 채 표출되면서 갈등 형성의 장이 될 것이라는 우려, 셋째, 청와대라는 정치적 대표성과 상징성 때문에 게시판이 정치적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을 결집해 정쟁의 장으로 변질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운영 3년
우리 사회 주목·해결할 문제 드러내
제도 운영 관련해선 우려도 적잖아

입법 논의 요구 많았던 점 감안하면
청원 발걸음 국회로 돌리는 게 마땅
‘국민동의청원’ 활용하는 것도 방법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은 미국의 위더피플(we the people)을 예로 했다. 하지만 위더피플은 청원 대상이 제한적이다. 행정부 권한에 속하는 내용만 받고 그 외 이슈에 대해서는 국회의 몫으로 필터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지지나 반대 관련 내용·연방정부 정책 등과 무관한 내용·소관 사항이 아닌 업무 내용 등은 청원 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국민청원제 디자인은 태생적 오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국민청원제는 17개의 청원 분야를 구분하고 있을 뿐 청원 내용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없다. 욕설이나 비속어, 폭력, 선정성, 청소년 유해 등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한 것 이외에는, 행정부 권한과 무관한 어떤 내용도 청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적 의견 교환과 토론, 합리적 합의가 가능해야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국민청원의 공간은 국민 소통 공간이 아니라 일방적인 의견 표출의 공간이 되었고, 청원 의견에 동조하는 세력의 수를 과시함으로써 파편화된 모습으로 대립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이는 소통 지향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시된 청원 내용 중 많은 것이 입법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었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헌법상 청원권을 보장받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의 청원권 행사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입법이나 정책 의안 발의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청원권은 입법 부재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1인의 소개가 필요했던 절차뿐만 아니라 실제로 국회에서 채택된 청원 건수가 터무니없이 적었다는 점은 국회의 역할론에 대한 비판의 기제로 충분하다.

다행히 올해 1월부터 국회는 국민동의청원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다수 시민이 의회의 정책 제안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참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에서 이 제도의 도입은 마땅하다. 국회의원의 소개 없이도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를 통해 등록된 청원이 30일 이내에 100명의 찬성을 받으면, 그날부터 7일 이내에 국회는 청원 요건에 대한 검토를 마쳐야 하고, 청원 요건에 적합한 경우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공개하게 된다. 그리고 공개 후 30일 이내에 10만 명의 동의가 있으면 청원으로 접수되어 법률안 등과 같이 의안에 준하여 처리하도록 법에 규정하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 전자청원제도를 운영해 온 독일이나 영국보다 국민동의청원제는 요건이 엄격하다. 하지만 제도 실행의 경험을 축적해 가면서 보완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건 법치(法治)의 바탕이 되는 제대로 된 입법을 통해 우리의 권리를 실현해 갈 수 있도록 청원의 발걸음을 국회로 돌려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 10만 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 내용을 국회에서의 충분한 심의 과정을 거쳐 입법 여부를 결정하도록 입법과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회가 입법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다음 선거에서 심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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