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코로나19와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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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철 한국해양대 교무부처장 해사글로벌학부 교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은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는 출발점이자 변방에서 세계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였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게는 흑역사의 시작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럽인들의 배에는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인 병균과 병원체도 함께 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연두로 원주민의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스페인 무기로 죽은 아스텍인과 잉카인보다 천연두에 걸려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비교적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병원균이었다.

그로부터 몇백 년이 지난 바다를 통한 교역 규모는 세계 무역의 90% 이상 차지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바다와 땅, 선원과 육지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바다를 건너 미지의 대륙을 찾아 나섰던 시대의 그것과 사뭇 달라졌다.

지난 7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선원들은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무조건 14일 자가격리가 아닌 합리적인 조치를 바랍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원활한 선원교대가 세계해운업계의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국제노동기구 해사노동협약 규정에 따르면, 선원의 승선 근무기간은 12개월 미만으로 제한되고 있다. 규정 위반 시 해당 선원은 즉시 하선해야 하고 선박도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 규정을 무력화시켰다.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찍힌 선원에 대한 육상의 시선이 국제규정까지 바꾸면서 선원이 땅을 밟는 행위 자체를 불허한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선원의 자국 상륙을 금지했다. 선원들은 한 번 승선하면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0만 명의 선원들이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각국 정부의 봉쇄조치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장기간의 고립생활로 선원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건강에 악영향을 미쳐 안전운항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이고, 글로벌 공급망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그래서 국내외 해운단체들은 국제사회에 선원교대 해법 마련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유럽인 항해자들은 바이러스의 ‘간접적’ 지원을 받아 비교적 용이하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잠재적 바이러스 전파자’라는 낙인을 짊어진 채 기약 없는 고립생활에 고통받고 있다.

넓디넓은 바다를 호령하며 거칠 것 없이 강인한 침략자이자 약탈자였던 선원의 이미지는 몇 백 년의 시간이 흘러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창궐로 세계가 심리적 경제적 공황상태에 빠진 지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육상세계와 격리된 채 일과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고된 직업군의 이미지로 변모하였다.

항해술의 발달과 교역의 증대, 이를 통해 추동된 지구화 흐름의 가속화는 바다와 인간의 조우 양상과 바다를 통한 물자와 사람의 교류 양상을 지속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바다를 터전으로 일하고 살아가는 해상운송 분야 종사자인 선원은 육지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우세 속에서 ‘바이러스 전파자’로 전락하고 있는 듯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일상의 90% 이상의 재화와 물자를 묵묵히 공급해주는 세계 무역의 중심축인 선원들의 권리와 노고가 자칫 육역중심 세계관으로 인해 잊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아울러 참다운 선원 정신 정립과 선원의 자긍심 고취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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