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반지성주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미국 민주주의는 유럽과는 다른 길이었다. 유럽은 왕정-귀족정-민주정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역사적·정치적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신대륙에는 왕도 귀족도 없었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부모와 자신이 살던 땅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의 나라다. 영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려는 식민지 백성의 독립전쟁과 함께 민주주의의 여정이 시작됐다. ‘자유’의 수호가 최상의 가치이고 모든 판단 기준이 개인의 자유에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미국 민주주의는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 각 주의 분권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미국은 자유의 가치를 무엇보다 강조하지만 각각의 주가 ‘평등’하다는 건국 정신 또한 포기한 적이 없다. 1840년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낸 프랑스 정치철학자 토크빌은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미국의 민주 제도에서 찾았다. 평등의 욕망은 불가피하게 중앙집권화 경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들, 가령 다수의 횡포와 국가 권력의 비대화, 전제주의 등장을 회피할 수 있는 장점이 미국 연방의 분권과 자치 기반에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 미국 민주주의의 근저에 ‘반지성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삶, 혹은 사색과 관찰·비판 같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상대적 경멸과 의심이 그것이다. 미국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주의가 미국 역사 속에 하나의 국민문화처럼 이어져 왔음을 지적한다. 대중의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기업가들이 선도하는 경제적 실용주의 따위가 대표적이다. 1950년대 횡행한 매카시즘 같은 반공주의도 반지성주의 확산을 부채질했다. 이상주의적 개혁가나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우파 정치가들의 공격이 유독 심한 나라가 미국이다.

얼마 전 대선 불복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심대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민주적 가치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는 정치가 타락했기 때문이고 곧 지성이 타락한 결과라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의사당 난입은 타락한 정치와 반지성의 한 정점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출범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는 과연 반지성주의의 그늘을 걷어낼 수 있을까.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