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의 세상 터치] 공정위, 해운업계 과징금 조치 적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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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2017년 2월 한국 해운업계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최대 국적 선사 한진해운이 퇴출된 것이다. 부실 경영과 사주 일가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정부의 파산 결정을 초래했다. 이후 세계 5위의 해운강국을 자랑하던 우리나라 해운력은 10위권 아래로 급락했다. 국내 수출입 기업들은 지금까지 외국 선사들의 해상 운임 인상과 갑질 등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 한진해운 덕분에 수십 년간 저렴한 물류비용으로도 수출입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기업들이 졸지에 편히 비빌 수 있는 언덕을 잃은 탓이다.

‘해운회사들 공동행위’ 제재할 예정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 적용해 논란
 
운임 담합은 해운법상 가능한 행위
과당 경쟁·독과점 폐해 방지할 목적
 
해수부·공정위 업무 조율에 나서야
해운업 육성 차원 합리적 해결 필요

해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정부와 국민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해운업이 수출입 물동량 운송의 99%를 담당한 기간산업인 점을 간과했다는 걸. 수익만 따지는 금융논리에 매몰돼 세계 해운시장에서 7위의 비중을 차지하는 한진해운의 가치를 몰라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확산됐다. 부실기업으로 간주된 한진해운 청산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진 수많은 국제 해상 항로는 오랜 세월 힘들게 공을 들여도 구축하기 힘든 경제 영토였던 것이다. 이에 정부는 2018년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을 세워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적 선박이 부족해 수출기업의 물류대란이 잦을 정도로 후유증은 여전하다.

해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며 경제 성장에 기여해 온 해운업계가 최근 또다시 위기에 놓였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지난달 국내 선사들에게 거액의 과징금 부과를 예고해서다. HMM(옛 현대상선)과 SM상선, 고려해운 등 11개 국적 선사를 포함한 국내외 23개 해운회사가 운임을 담합해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는 거다. 이들 선사가 2003~2018년 15년 동안 한국~동남아시아 항로의 운임을 담합하며 부당한 공동행위를 했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선사들은 모두 122차례 운임 합의를 시행했다. 이 때문에 공정위는 동남아 노선에서 15년간 발생한 매출액의 8.5~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운임 담합으로 공정 경쟁을 해치고 부당 이익을 취했으니 제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해운업계는 과징금이 5000억~7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 선사 대부분이 경영난을 겪거나 정부 지원에 의존하다가 올해 글로벌 해운경기 호조에 힘입어 겨우 숨통이 트인 상황을 고려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다.

과징금 부과가 이뤄지면 해운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해운 재건 정책마저 무산될 것이란 해운업계의 지적이 나온다. 중소 선사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과징금은 기업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인 까닭이다. 국적선 증대가 필요한 마당에 되레 선사들이 과징금을 마련하기 위해 배를 팔아야 할지 모른다. 한국해운협회는 “일반 산업과 달리 특수성을 가진 해운업에 공정거래법을 적용하는 건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발한다. 그간 동남아 노선의 빈번한 운임 하락으로 영업적자에 허덕였다는 주장도 했다.

공정위의 제재 움직임은 현행 해운법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 이 법 제29조에는 ‘외항화물 운송사업 등록자는 다른 외항화물 운송사업자와 운임·선박 배치, 화물 적재, 운송조건에 관한 계약이나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통상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는 담합 같은 공동행위가 국내외 해운업에서만큼은 필요 불가결한 조정 수단으로 인정된다. 세계 주요 선사들의 해운동맹 카르텔이 그러하다. 정기선 해운에 공정 거래를 명목으로 무제한 경쟁을 허용할 경우 선복량 과잉과 출혈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금력을 바탕으로 살아남은 몇몇 대형 선사의 독과점 폐해처럼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려는 공동행위에 대한 과징금 조치는 해운업의 위기를 키울 수 있어 학계에서도 우려한다.

특히 해양수산부는 해운 재건사업을 펼치면서 국내 선사들의 파산과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해 공동행위를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정부 부처 간 엇박자는 시장을 혼란에 빠트리고 정책 불신을 낳기 마련이다. 해수부가 공정위를 설득하는 등 합리적인 업무 조율이 시급하다.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이 나선다면 고무적일 것이다. 22일 정치권이 과징금 구제대책 논의에 들어갔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요즘 수출기업들이 웃돈을 주고도 배를 구할 수 없어 수출에 차질을 빚기 일쑤다. 부산항은 선적하지 못한 수출 컨테이너 적체 현상에 시달린다. 정부가 국적 선사들에 임시 선박 투입을 늘리도록 유도하고 재정도 지원할 때다. 상황이 긴박한 시점에 선사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과징금 조치가 과연 법적·시기적으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해운업 육성을 위해선 먼저 제정된 해운법과 공정거래법의 충돌 부분에 대한 정리와 함께 해운법 보완이 절실하다.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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