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회색 코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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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는 부처님 열반 50년 전후에 성립된 초기 경전이다. 법정 스님 번역본에 이어 공지영 작가의 는 소설로 한국 사회에 시처럼 회자되는 문구다. 돈, 자식, 명예 등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 욕망, 아집, 탐욕을 버리라는 뜻으로 현대 사회에 울림을 준다. 당초 한국 번역본은 대개 일본 책이나 한문 경전을 옮기면서 코뿔소를 무소, 물소, 외뿔소 등으로 소개했다. 인도 코뿔소는 주둥이의 끝 위에 한 개의 뿔이 달려 있고, 주로 혼자 생활을 한다고 한다.

불경과 함께, 아프리카와 인도에나 서식하는 코뿔소가 갑자기 중국과 한국에도 여러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보도다. 이른바 ‘회색 코뿔소’ 경고다. 멀리서 풀을 뜯는 코뿔소는 덩치가 커서 달려오면 땅이 흔들려 위험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지속적인 경고로 사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무시하다가 통제 불능의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지칭하는 용어가 회색 코뿔소다.

중국 공산당 최고 경제정책 결정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가 최근 부동산 거품, 국유기업의 과도한 레버리지, 지방정부 부채 등 중국 경제 위기를 우려하면서 회색 코뿔소의 재앙이 공개적으로 회자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중국 2위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그룹의 360조 원에 이르는 채무 디폴트 위기가 계속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와 세계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재정·통화·금융당국 수장들이 7개월 만에 한데 모여 헝다 사태와 함께 국내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가계 부채, 원리금 상환 유예 중인 기업의 부채 급증 등 심상치 않은 경제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고 경고할 정도다.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몰락, 청년 세대 취업 포기족과 부동산 영끌족 증가, 속칭 지도층의 사리사욕과 일확천금 세태까지 사회 모든 분야에서 회색 코뿔소가 달려오는 진동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회색 코뿔소에 대응하는 방법은 ‘존재를 인식하고, 위기를 허비하지 말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탐욕과 애착, 미혹의 그물에 갇히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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