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유령처럼 배회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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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관에는 영화가 끝난 후, 영화해설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대개 한 달에 3~5회 정도 진행된다. 이 해설을 맡은 지 이제 1년 차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처음엔 그 부담감이 얼굴의 경직과 버벅거림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주 약간은 여유가 생긴 것도 같다. 그래도 해설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건 아닌지 걱정하며 극장을 나오기 일쑤다.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시네필(영화애호가)을 위한 영화들로 좌석 점유율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은 유독 많은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19 이전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독일의 거장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바바라’가 어떤 부분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관객들은 또 어떤 장면에서 감흥을 느꼈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호기심이 일었다.

독일 페촐트 감독 영화 '바바라'
서독행 원하는 의사의 갈망 그려
동독 사회 환부 은유적으로 표현
인물 감정·혼란 섬세하게 풀어내

1980년대 초, 여의사 바바라는 동독의 수도 베를린에서 서독으로 이주하겠다고 출국신청서를 냈지만 돌아온 건 시골마을 병원으로의 좌천과 슈타지(국가보안부)로부터의 철저한 감시와 검열이었다. 수시로 집 수색을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는 몸수색까지 바바라의 일상은 감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웃마저도 그녀를 감시하는 삶속에서, 바바라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며 ‘유령’처럼 집과 병원만을 오간다. 희망도 열정도 잃은 그녀지만 환자를 돌볼 때만은 다르다. 특히 병원을 찾은 스텔라와 마리오는 바바라를 변화시키는 특별한 환자다.

노동수용소에서 강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던 스텔라는 풀숲에서 6일 동안 숨어 있다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병원에 온 소녀이고, 마리오는 큰 수술을 받은 후 신체 기능은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감정 표현을 잃은 소년이다. 도망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어 온몸으로 폭력을 받아들이는 스텔라와 감정을 잃고 오로지 식욕에만 집중하는 마리오의 모습은 마치 당시 동독 사회의 환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바바라는 이들 환자들과 만나 교감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서독으로 떠나려는 절실한 여인의 삶에 집중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살고 있는 동독의 작은 마을에도 희망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바바라를 지켜보며 끊임없이 관심을 표현하는 동료의사 안드레. 슈타지의 명령으로 바바라를 감시했지만, 이를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노라고 솔직히 밝히며 바바라에 대한 호감을 표한다. 안드레의 마음을 외면하고 거부하던 바바라는 안드레의 진심에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마치 한 편의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바바라’가 사회의 부조리함이나 억압적인 시스템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페촐트 감독은 독일의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며 당대의 아픔과 모순 그리고 개인들이 겪는 혼란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낸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분단된 국가의 경험과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경험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바로 ‘바바라’이다. 선한 의사 안드레가 바바라를 감시하며 보고서를 써야만 하는 현실, 공안경찰이 한 여성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도 아내의 병(病) 앞에서는 안타까운 남편의 얼굴을 보여주는 등 진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국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얼굴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음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 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사랑을 갈망했던 바바라의 이야기까지 충분히 공감 간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에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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