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역가스라이팅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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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전포와일드클럽 아트홀에서 ‘가스라이팅’ 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주제의 연극이 24일부터 공연되고 있다. 다음 달 3일까지 목·금·토·일요일마다 막을 올린다. 이 연극은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고 한다.

가스라이팅은 전문적인 정신분석이나 정신의학 등의 연구를 통해 확립된 학술 용어는 아니다.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1944년에 상영된 미국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말이다. 요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례가 흔해지고 있다. 유튜브 등 온라인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쉽게 접한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생활 속에서 이 용어를 쓰는 경우도 잦아진 느낌이다.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조종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가스등에서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를 정신증 환자로 만든다. 가스라이팅이 나쁜 이유는 조종 당한 상대가 문제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점은 가스라이터에게 조종 당한 피해자가 “내가 잘못했나 보다, 나는 왜 이렇지…”라며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신감을 잃는 것이다. 직장과 가정 등 회피하기 어려운 공간이나 관계 속에서 상습적인 가스라이터를 지속적으로 만난 피해자는 우울감에 빠지는 등 큰 피해를 겪을 우려가 크다.

가스라이팅은 분명 근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의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가스라이팅 사례는 갈수록 만연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심을 담은 악의 없는 조언이나 방법적으로 서툴더라도 새겨들을 만한 충고들까지 싸잡아 가스라이팅으로 호도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다음의 가상 대화를 들어보자. 직장 선배 A “열심히 일하다 보면 자신감도 점점 생기고 너의 삶도 더 행복해질 거야.” 직장 후배 B “지금 가스라이팅하시는 겁니까?” 상대 의중을 따져 적확하게 판별하지 않은 채 가스라이팅 용어를 남발하는 것은 되레 ‘역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다. ‘역가스라이팅’이 건전한 격려와 조언, 설득까지 ‘멸종’시키는 무소불위의 방어기제로 자리매김할 조짐마저 보인다. 가스라이팅 용어 유행이 모두의 입과 마음을 닫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더욱 단절시킬까 우려되는 시절이다. 천영철 문화부장 cyc@


천영철 기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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