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소울리스좌'와 노동 존중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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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사회부 차장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이런 평가를 받는 인턴 장그래가 부러웠다. 2012년 웹툰 <미생>이 연재될 때였다. 주인공 장그래보다 한참 연차가 높았는데도 좀처럼 힘을 빼기가 어려웠고 나도 모르게 무리하다 제풀에 지쳤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달라진 건 없다. 다만 그동안 알게 된 게 있다면 장그래는 특별해서 주인공이었다는 거다. 평균 주 5일 하루 8시간을 쏟고, 그 대가로 나와 가족의 생계를 얻는 ‘일’의 속성상 일에서 초연하게 거리를 둘 수 있는 임금 노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영혼을 바쳐 일해야 한다는 게 기성세대의 윤리라지만 2030세대 직장인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소울리스(영혼 없음)’라는 말의 쓰임을 보면 그렇다. 열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계적인 응대를 부정적으로 꼬집을 때 쓰던 표현에는 어느새 감정 노동 없이 문제에 대처하는 내공에 감탄하는 뉘앙스가 더해졌다. 나긋한 목소리와 느긋한 동작으로 속사포 랩을 하듯 안내 멘트를 하는 한 놀이공원 직원의 동영상이 이렇게 ‘소울리스좌’라고 불리며 화제가 됐다. 역설적으로 소울리스는 영혼을 지키면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 선택한, 대개는 단련된 태도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경지다.

사람들은 일터에서 몸과 마음을 다친다. 직장갑질 119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공개한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정신질병 사망자(자살) 산재 신청은 158건으로, 처음 100건을 넘었다. 이 중 88건이 산재로 인정됐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스트레스와 정신질병 간 인과 관계가 입증된 결과다. 그해 공무원의 정신질환 사망 순직도 26건이 신청돼 10건이 인정됐다.

과로사와 사고사는 새삼스럽지 않다. 지난해 전체 산재 질병 사망자(1252명) 가운데 289명이 과로로 인한 대표적인 질병인 뇌심혈관계질환으로 사망했다.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일하다가 사고로 죽은 사람은 828명인데, 이 중 절반 이상은 안전 수칙만 제대로 지켜졌어도 막을 수 있는 떨어짐, 끼임 등 재래형 사고였다. 우리나라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과 산재 사망사고 발생률은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네 번째로 높다.

정부는 국정과제 노동 분야에서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출범 후 노동 정책 방향은 ‘반노동’이라 비판받은 대통령의 후보 시절 발언을 더 떠올리게 한다. ‘주 120시간 노동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은 주 52시간제 유연화 추진으로, 산재 사망사고 현장에서 '노동자 과실'을 말한 인식은 중대재해처벌법 완화 추진으로 이어진다. 고용노동부로도 모자라 교육부에도 '기업에 인재를 공급한다'는 새 존재 이유를 부여했다. 급기야 대기업에 법인세 인하라는 선물을 주면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자제를 요구했다. 노동계는 하투를 시작했다.

노동 존중 사회는 노동자의 희생으로 경제 발전과 기업 번영을 이룰 때가 아니라 노동자가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일상과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때 실현된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노동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어렵다.” 대통령 스스로 불과 두 달 전 발표한 노동절 메시지에 답이 있다. i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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