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미미한 것들의 응축된 힘, 일상 속 예술로 이야기하다 [부산미술, 작가와 공간]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부산미술, 작가와 공간] 작가 1. 김경화

대학 졸업 후 재봉사로 취업
서른에 미대 진학 입체조형 주력
서울대 대학원서 시멘트로 작업
일광 바닷가 ‘자개 알’로 큰 주목

김경화 작가는 자개장롱과 서랍을 이용해 여성을 위한 민화 책거리를 만들었다. 오금아 기자 김경화 작가는 자개장롱과 서랍을 이용해 여성을 위한 민화 책거리를 만들었다. 오금아 기자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작가와 개성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공간. 부산미술의 내일을 만들어가는 작가와 공간 이야기를 들어보는 기획 기사를 마련했다. 첫 번째 주인공은 김경화 작가. 지난해 가을 일광 바닷가에서 열린 2021 바다미술제에 3m 높이의 검은 자개 알을 선보여 주목을 받은 부산 작가이다.


■미싱에서 미술로

김 작가는 조금 늦게 미술을 시작했다. 집에서 ‘미술하는 것’을 반대했다. 무역학과 88학번이 된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미술 재능을 현수막을 그리는 데 썼지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노동 현장을 찾아갔어요.” 봉제 관련 재하청 업체. 영세공장을 뜻하는 ‘마치코바’에 들어가 ‘미싱 일자 박기’부터 배웠다. 1년 만에 큰 신발회사로 옮겼다.

“제가 일이 밀리면 다른 사람들까지 영향이 가니까, 허리가 나갈 정도로 숨도 안 쉬고 일했어요. 노동운동을 하러 갔지만 노동만 하고 나온 셈이죠.” 패배감을 안고 회사를 나와 생활한복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김 작가의 남편이 제안했다. ‘당신 꿈을 실현해 보라’고. 서른 살의 김경화는 경성대 미대생이 됐다.

처음엔 서양화 전공을 택했지만, 입체조형이 재미있고 더 잘 맞았다. “그림 그리기가 꿈이었지만 평면은 좀 갑갑했어요.” 일상적 재료를 가지고 작업화하는 재미도 컸다. 2002년 첫 개인전 ‘부드러운 시선’(PS14갤러리)에서 김 작가는 천으로 만든 대형 망치, 칼, 도끼 같은 것을 전시했다. “공구는 도구지만 무기도 될 수 있습니다. 그 무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무력화시킨 작품이죠. ‘일상이 예술과 충분히 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이때 만들어졌어요.”


위쪽부터 천으로 만든 공구, 시멘트 비둘기, 자개를 재료로 한 고양이 작품. 김경화 제공 위쪽부터 천으로 만든 공구, 시멘트 비둘기, 자개를 재료로 한 고양이 작품. 김경화 제공

■길고양이와 비둘기

남들보다 늦게 들어선 예술의 길.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한 김 작가는 서울대 미대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소프트한 느낌 대신 하드한 느낌의 작업을 하고 싶어 조소과를 지원했어요.” 대학원에서 그는 시멘트로 고양이와 비둘기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일이 벅찼어요. 저녁 산책을 하다 길고양이가 비닐봉지를 뜯어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데 감정이입이 되더라고요.” 낯선 곳에서의 삶, 빠른 변화를 못 따라가는 느낌. 김 작가는 도시라는 공간이 소외되는 존재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인간 이외의 존재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자.’ 시멘트로 고양이를 만들어 옥상에 두고 1년간 비바람을 맞혔다. 비둘기의 경우 재개발 지역 폐콘크리트 잔해를 넣고 시멘트를 부어 굳혔다. 변색되고 상처 입은 길고양이와 비둘기를 표현했다. “대학원 졸업작품전으로 고양이 100마리, 비둘기 200마리를 만들어서 서울대 미대 노천광장에 쫙 깔았어요. 다들 식겁했죠.” 이 작업은 2008년 대안공간 반디 유망작가 지원전 ‘굿모닝’에서도 소개됐다.


■일상 속 예술

김 작가는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 1기 입주작가이다. 2010년 중앙동 작업실에서 작가는 시멘트와 자개 작업을 했다. 입주 건물의 ‘도끼다시(테라초)’ 바닥. 계단 중간에 미장이들이 꽃병 모양 등 장식을 넣어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상 속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었어요. 시멘트 작업과 자개의 연결점은 ‘잊힌 것들이지만 빛나는 존재’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거죠.”

자개 작업을 하던 김 작가는 민화적 표현에 눈이 갔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누벼서 조각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조각보처럼 컬러풀하게. 아름답지만 속에는 묵직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복 천 뒷면에 재봉틀로 1991년 독재정권에 분신 항거한 박승희 열사를 그려낸 작품은 2017년 이한열기념관에 이어 2020년 영주맨션에서도 소개됐다. 또한 김 작가는 장숭인 작가와 함께한 ‘팀스크래치 합동작전-잘살아보세’(2011년), 윤필남 작가와의 2인전 ‘네트 투 네트’(2016년) 등으로 잘 사는 것의 의미, 관계망과 사각지대 등 우리 사회 문제를 예술로 드러냈다.

2014년 또따또가 갤러리에서 선보인 ‘소망세트’는 폐상자를 활용한 작업이다. 폐상자를 펼쳐 부귀와 평안을 상징하는 ‘모란화병도’를 그리고, 폐상자 안에 자개를 붙인 민화 장식물을 넣어 액자처럼 만들고. 김 작가는 작업을 통해 일상 속 재료로 예술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김경화와 윤필남 작가 2인전 '네트 투 네트'에 전시된 작품 '병원'. 작가 제공 김경화와 윤필남 작가 2인전 '네트 투 네트'에 전시된 작품 '병원'. 작가 제공

박승희 열사를 그린 김경화 작가의 작품 '오늘 하루는 열사가 살고 싶었던 내일'. 작가 제공 박승희 열사를 그린 김경화 작가의 작품 '오늘 하루는 열사가 살고 싶었던 내일'. 작가 제공
2021 바다미술제 제공 2021 바다미술제 제공

■바다 그리고 생명

자개로 만든 고양이, 자개농 그림을 활용한 콜라주…. 2020년 김 작가는 자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자개장롱과 서랍으로 민화 책거리를 재현한 작품에는 허난설헌, 박경리, 한강 등 여성 소설가들의 책이 꽂혀 있다. “여성에게 바치는 책거리죠.” 2022 4·3미술제에서 김 작가는 자개로 제주 풍습이 담긴 제사상을 구현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품 ‘4·3 감모여재도’를 전시하기도 했다.

지난해 바다미술제에서 선보인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자개장롱 12개의 문짝이 들어갔다. “통영칠기 박영진 대표님의 도움이 컸어요. 바다에서 온 자개로 큰 알을 만들고, 그 알을 육지 쪽으로 약간 기울여서 세상에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살렸어요.” 알은 생명의 시작이며 근원이다. 김 작가는 지난 6월 다대포에서 진행된 실험실C의 ‘1제곱미터의 우주’에도 참여했다. 그는 어업용 폐스티로폼에 바다에서 주운 유리 조각 183개를 붙여 새의 알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해양 쓰레기 문제를 고발했다.

노동운동가를 꿈꾸었던 김경화는 이제 예술로 ‘잊히고 버려진 것’ ‘상처받은 생명’을 보듬는 예술가가 됐다. 그의 작업실에 가면 색색의 천이 쌓여 있다. 그리고 재봉틀이 있다. 작가에게 ‘재료를 집적하고 모자이크처럼 조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뭔가 큰 것을 만드는 것은 폭력적인 형식 같아서 조심스러워요. 미미하지만 작은 것들, 그것들이 왁 모였을 때 가지는 힘이 있거든요. 그것이 민중일 수도 있고, 비둘기나 고양이처럼 작은 생명일 수도 있죠.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