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머피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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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15년간 사용해온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하필이면 더워지기 시작하는 무렵에, 갑자기 냉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바닥으로 물이 샜다. 쉽게 상할 만한 음식들을 서둘러 먹어치우고 스무 알이 넘는 달걀을 모두 굽거나 삶았다. 나는 삶은 달걀을 소금에 찍어 먹으며 생각했다. 왜 꼭 보일러는 겨울에 고장이 나고 냉장고는 여름에 고장이 날까. 컴퓨터는 원고마감일 무렵에 먹통이 되고 생필품은 늘 동시에 똑 떨어지고… 아… 인생은 난감함의 연속이다. 머피의 법칙인가.

하지만 그런 비관론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냉장고 수리를 요청하든지 새 냉장고를 구입하든지 무슨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실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고 몇 년 전 여름에도 한 번 고장이 나서 꽤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컴프레서를 교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수리를 해준 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고장이 나면 차라리 냉장고를 바꾸는 편이 나을 겁니다. 연식이 오래돼서 계속 문제가 생길 거예요.” 그 말이 떠오른 덕분에 새 냉장고를 구입하기로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떤 냉장고를 사느냐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것은 600L가 넘는 양문형 냉장고였는데 나는 언제부턴가 냉장고의 크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필요할 때만 켜면 되는 다른 가전과는 달리 냉장고는 24시간 내내 켜두어야 하니 쓸데없이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주범이기도 한 데다, 나의 좁은 부엌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대해서 마치 내가 냉장고를 모시고 사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크고 아름답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최신형 냉장고들의 유혹을 거뜬히 물리치고 200L대의 소형 냉장고를 선택할 수 있었다. 원룸이나 회사 탕비실에서 주로 쓸 법한, 냉장과 냉동 외에는 딱히 기능이랄 것이 없는 단순한 구조의 하얀 냉장고 말이다.

이제 내 부엌은 조금 더 넓어졌고 우리 집의 전기 사용량은 조금 줄 것이다. 원 플러스 원 상품을 충동구매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동안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불편함은 곧 적응이 되겠지. 나의 선택이 지구 환경에 도움이 될까. 글쎄, 나는 낙관론자가 아니고 우리의 작은 노력을 미래에 대한 거창한 희망으로 연결시키는 데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 특히나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런 때에,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며 우호적인 태도마저 취하는 어떤 세력들을 볼 때, 개인의 작은 노력은 그저 무력하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면서 그런 무력감을 넘어서기로 해 본다. 더운 날씨에 고장나 버린 냉장고를 보며 떠올렸던 머피의 법칙은 뭔가 되는 일이 없을 때 흔히 쓰는 말이지만, 실은 단순한 비관론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머피는 미공군 소속 대위였고 어떤 실험을 진행 중이었는데 부하 기술자들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한 바람에 실험이 실패해 버렸다. 이후 그는 ‘어떤 일을 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쓴다’는 법칙을 만들었다. 우리가 흔히 불운을 뜻하는 말로 알고 있지만 사실 머피의 법칙은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고 ‘어떤 일이든 반드시 나쁘게 흘러갈 수 있으므로, 잘못될만한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나의 선택과 나의 행동, 나의 말과 글은 너무도 작고 조용해서 지구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발 딛고 있는 공간에 연둣빛 싹을 하나 틔우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누군가와 작은 연대의 고리 정도는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잘못될 만한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말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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