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산문학관을 꿈꾸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수우 시인·부산작가회의 회장

문학관에 관한 고정관념 깬
새로운 개념·장소 접근 필요
‘존재의 회복’ 아이콘 돼야
진정한 공감, 따뜻한 울림
미래 공동체 개척 감수성 기대

지난해 10월 25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부산문학관 건립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 부산일보DB 지난해 10월 25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부산문학관 건립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 부산일보DB

부산문학관. 오랜 숙원이었던 만큼 간절하고 기대도 크다. 그동안 지역문학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으므로 설렌다. 그런데 마냥 신나지만은 않다. 부산 정신과 지역의 혼을 담아내는 지역문학관의 고귀한 역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산문학관을 어떤 식으로 마주하게 될까. 그냥 남부럽지 않게 ‘우리도 하나 있다’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문학관을 짓는 데 중요한 잣대는 무엇일까. 잘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문학사가 중심이겠지만, 그렇다고 기능성과 유용성이라는 근대적이고 도구적인 잣대로만 지을 것인가. 부산문학관 건립은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 세우는 일이 아니다. 문학관의 기능은 곧 문학의 기능이다. 문학의 역할 중 최우선은 ‘존재의 회복’이다. 회복이란 근원에 대한 상상력과 함께 공감의 능력을 생성해 내는 힘이다. 근원을 제대로 기억할 때 회복의 상상력이 작동한다. 그때 유한이 무한을 이해하는 방식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대상화된 문학관, 유용성만을 따진 문학관은 인문이라는 예언적 지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문학관에 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문학관을 기대한다. 개념부터 새로울 필요가 있다. 장소부터가 중요한 개념이다. 넓은 데에 크게 짓고 보자는 것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이다. 작아도 아름답고 역사성을 품어야 한다. 문학의 가치가 ‘회복’에 있다면 장소 역시 ‘회복’의 철학이 필요하다. 부산의 특성은 해양수도와 피란수도이다. 둘 다 그 자체로 회복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두 특성을 끼고 있는 부산항의 근대사는 한국 전체의 근대사가 아닌가.

부산문학관을 어떤 성과로 내세우려는 건 금물이다. 어떤 장소성을 품고 있는가, 얼마나 부산답고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가 우선이다. 부산이 국제도시가 되면 될수록 부산문학관은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 있는 몇 개 작은 문학관들은 모두 동쪽에 있다. 지역 문화의 심각한 불균형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부산문학관만큼은 원도심이나 서쪽에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문화도시가 되려면 중심 역과 가까운 곳에 배치되는 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적어도 중심 역에서 10분 내 거리에 큰 극장이나 갤러리, 서점가 등 훌륭한 예술 거리가 형성될 때 그 도시가 문화도시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산문학관을 기도한다. 혼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문학관, 좀 작아도 꿈의 요람이 되는 문학관을 기다린다. 전 지구적 위기 속에서 ‘크게’ 짓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크면 클수록 엄청난 소비재이기 때문이다. 인문은 덧셈과 곱셈이 아니라 뺄셈과 나눗셈이다. 그렇다면 인문정신이 통째로 담기는 부산문학관의 뺄셈과 나눗셈은 무엇일까. 진정한 공감, 따뜻한 울림은 건축물의 크기와 상관없다. 존재론적인 장소의 힘이 더 절실하다.

부산의 출산율, 부산의 미래는 시민의 행복감에서 나온다.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이 많아지고 문화가 풍성해지는데도 왜 시민은 행복하지 않을까. 극단적인 물질주의를 사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이상도 소비재로 바꾸고 만다. 그 속도가 여느 나라보다 빠르다. 소비도시를 사는 시민의 속성을 변화시킬 새로운 감수성을 담은 문학관을 기다린다. 미래 공동체를 개척하는 진짜 문학관을 기다린다. 인식이 아니라 감동, 그리고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사유하는 문학관을 고대한다.

보수동 책방골목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고, 문예 청소년과 문학청년이 전국에서 최하위인 부산이다. 부산문학의 위기가 빙산 같다. 이는 예비 중인 부산문학관에게도 던져진 질문이 아닐까. 그동안 부산문학관 건립을 위해 현황 조사와 공개 포럼, 라운드 테이블이 많았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문학관이 기능적으로 책상 위에서 기획되는 느낌에 창작인으로서 당혹스러웠다. 어떤 도구성과 유용성에 치우치는 것 같아 불안하면서 문학이란 이름이 갑자기 곤혹스러워지는 것이다. 부산문학관 설립에 행정적 사고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빈곤한 껍데기를 살아갈 것이다. 우리 시대에 주어진 이 새로운 소명이 무겁다. 부산문학관은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 더 생기는 일이 결코 아니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